▽‘노란불’ 앞에서 주춤해서는 안 된다=“총선 이후 한국경제는 빨간불도 파란불도 아닌, 노란불이 켜져 있는 상태다.”
서강대 김광두(金廣斗·경제학) 교수는 최근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요 경제현안을 놓고 정부 부처와 청와대, 그리고 정치권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다 보니 경제 주체들은 신호등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냥 서서 기다리고만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금 상황에서는 시장경제의 틀 속에서 ‘성장’에 더 무게를 싣고 있는 이헌재(李憲宰)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정책방향이 맞다고 본다”며 “만약 이 부총리를 교체할 생각이 없다면 그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총선 이후 정치권을 중심으로 경제정책과 관련해 ‘다른 목소리’가 부쩍 잦아진 점에 주목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兪炳圭) 상무는 “총선 이전까지만 해도 ‘투자활성화를 통한 경기회복’이 대세였는데, 총선 이후에 갑자기 ‘분배 우선’ 등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며 “정치권은 총선 이전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최근 주요 정치현안을 두고 잇달아 불거진 정책혼선을 빨리 마무리하고 경제사령탑에 힘을 주는 것만이 경제불안 심리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활성화가 핵심이다=전문가들은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어려움을 회복할 수 있는 ‘핵심고리’로 투자활성화를 들고 있다. ‘투자활성화→고용증가→개인소득 증가→소비증가’의 연결고리가 작동하는 것만이 한국 경제가 내수침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설비투자는 전년 대비 4.6% 감소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1·4분기(1∼3월)에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0% 줄었다.
이 같은 투자부진은 결국 고용감소로 그대로 이어져 매년 40만, 50만개씩 늘어나던 일자리가 지난해에는 거꾸로 3만개가 감소했다. ‘사라진’ 일자리는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과 임시직이 대부분으로 결국 투자부진의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층에게 돌아간 셈이다.
창업열기도 주춤해 신설법인숫자도 2000년을 정점으로 계속 감소해 경제 전체의 활력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 전무는 “기업들이 한국에서 기업을 할 수 있는 인센티브와 의지를 갖도록 해줘야 한다”며 “지금처럼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나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는 투자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고 지적했다.
유병규 상무는 “정치권은 아직도 한국 경제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며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3.1%인 상황에서 올해 5%대 성장률을 올린다고 해도 경제가 크게 좋아진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최흥식(崔興植) 부원장은 “정부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시장이 잘 움직이도록 도와줘야 투자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며 “금융시장 측면에서는 중소기업 관련 제도를 정비해 경쟁력을 잃은 기업은 시장에서 빨리 퇴출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기업들은 시장에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배문제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기본으로=최근 정치권 등에서 거론되고 있는 ‘분배’문제도 시장경제 원칙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대 홍기택(洪起澤·경제학) 교수는 “정치권의 경우 표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분배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분배문제에 접근해야 하며, 정치권은 이 같은 점을 국민들에게 설명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빈곤층 등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는 결국 ‘돈’으로 연결된다. 경기가 활성화되고 기업과 개인의 소득이 증가해 세수(稅收)가 늘어나야 소외계층을 배려할 수 있는 재원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김광두 교수는 분배문제에 있어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근로능력이 없는 빈곤층에게는 직접적인 지원을 하되, 근로능력이 있는 계층에게는 교육을 통해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도와줘야 한다”며 “이와 함께 경제적으로 최상위 계층은 현재보다는 조금 더 세금을 부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무섭게 추격해 오는 후발국가들▼
최근 한국 경제가 주춤하는 사이에도 경쟁국이나 후발 개도국들의 경제 성장 엔진은 꺼지지 않고 있다. 한때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렸던 홍콩, 싱가포르, 대만은 물론 태국, 베트남 등 후발 개도국도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에다 21세기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주목받고 있는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도 국부(國富) 증진을 향해 뛰면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꿈에 부풀어 있다.
▽“게으른 동남아시아 국가는 없다”=더운 날씨와 오랜 식민지 지배에 따른 나태한 국민성 때문에 한동안 ‘낙후 지역’으로 알려졌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최근 외자 유치 등을 통해 급성장하고 있다.
대표 주자는 ‘개혁 개방 정책’으로 돌아선 후 급성장을 하고 있는 베트남. 지난해 베트남은 국내총생산(GDP)의 8%에 이르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했다. 이 같은 비율은 중국보다도 높은 것.
경제성장률도 기록적이다. 지난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7.4%. 세계은행에 따르면 베트남은 이처럼 경제가 계속 성장하면서 1993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58%에 이르렀던 빈곤층 비율이 2002년에는 29%까지 떨어졌다.
밀려들어오고 있는 외국인 직접투자에 베트남의 저렴한 노동력이 결합되면서 수출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수출은 200억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20% 급증했다.
태국도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로 한때 바닥으로 곤두박질했던 태국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6.5%에 이르렀다. 자동차 내수 판매도 30%나 상승했다.
태국이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에 대해 경제 전문가들은 취임 4년째에 접어든 탁신 시나왓 총리의 ‘듀얼트랙(Dual Track) 정책’이 주효한 덕분이라고 보고 있다. 이 정책은 외환위기를 교훈 삼아 ‘수출과 내수’, ‘정부와 민간’ 같은 경제 운영의 다양한 요인을 균형 있게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다. 기초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수출 확대에만 주력하다가 외환위기에 빠진 교훈을 잘 활용하고 있는 셈.
▽BRICs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성장 엔진=세계적인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는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현재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BRICs의 경제 규모는 캐나다를 제외한 G6의 15%에 불과하지만 2025년에는 50%, 2040년에는 G6를 초과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전망은 현재 이들 국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성적표를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간다. 우선 BRICs 중 잠재력이 가장 큰 것으로 꼽히고 있는 러시아는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6.7%(추정)에 이르렀다. 무역수지는 500억달러 흑자(추정)로 사상 최대였다. 외환보유액도 750억달러에 육박했다. 유가와 가스값 상승으로 러시아는 자원 대국의 이점을 마음껏 누린 셈.
중국도 세계 경제에 ‘중국 쇼크’를 가할 정도로 고속성장을 하고 있고, 인도와 브라질도 풍부한 자원과 거대한 내수 시장을 무기로 한국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이념’보다는 ‘빵’이 우선=최근 유럽연합(EU)에 가입한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등도 경제 성장을 위해 국가 지도자들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EU시장 진출을 노리는 외국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외국 기업 총수들을 만날 정도다.
여기에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국가였던 이들 나라가 법인세율 인하와 공장부지 제공, 노조활동 금지 등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인센티브까지 내놓고 있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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