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좀 살려주세요]<2>있는 사람도 안쓴다

  • 입력 2004년 5월 13일 18시 02분


13일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명품 매장. 오전이긴 했지만 20분 동안 매장에서 고객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수선 맡긴 바지를 찾으러 온 송모씨(57·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친구 모임을 해보면 불황을 실감한다. 한 달에 세 번 있는 친구모임을 보통 청담동 중국식당에서 했으나 최근에는 4500원짜리 콩나물 국밥도 먹어봤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송씨는 건물 임대사업을 하고 있는데 최근엔 입점업체가 나가면 다시 들어오려는 곳이 없어서 소득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경기불황이 지속되면서 부유층도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있는 사람은 그래도 쓰던’ 외환위기 때와도 사뭇 다른 양상이다. 백화점들은 구매 액수로 상위 1∼5%에 해당하는 고객들의 구입액이 작년보다 줄었으며 강남 일대 고급 미용실도 10% 내외의 매출 감소세가 나타나고 있다.

썰렁한 명품 매장
비교적 경기에 민감하지 않았던 ‘돈 있는 사람들’마저 지갑을 닫고 있다. 13일 서울 강남의 A백화점 명품관이 손님들이 거의 없어 한산했다. 박영대기자

청담동 도산공원 인근의 한 미용실에서 머리 염색을 하고 있던 주부(39·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사업을 하는 남편이 가져다주는 돈은 크게 줄지 않았다. 그러나 불황이 지속되고 언제 나아질지도 모르니 씀씀이를 줄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명품으로 꼽히는 한 브랜드의 강남 백화점 잡화매장은 평일 고객이 하루 15명 내외, 주말에도 20명을 넘지 않는다. 4월 말까지 매출이 전년보다 약 5% 줄었다.

강남의 A백화점에서 연간 3000만원 이상 사는 초우량 고객수와 구입금액은 올 들어 4월까지 지난해 동기보다 각각 0.5%, 0.4% 줄었다. B백화점도 상위 1% 고객의 매출이 지난해 동기 대비 3.1% 감소했다.

골프장의 경우 고객 수는 크게 줄지 않았지만 업계는 불황을 느낀다. L골프장 윤모 대표는 “올해 들어서는 회원들로부터 예약이 되지 않는다는 불만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며 “수도권 이외 지역의 골프장은 내장객이 줄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현금만 10억원가량을 지닌 고액 자산가들의 재산관리를 해주는 시중은행의 한 프라이빗뱅킹(PB) 관계자들은 부자들의 씀씀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한 은행 김모 PB팀장은 기념일이나 명절에 고객들로부터 구두 티켓이나 상품권을 받곤 했는데 요즘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의 가계대출 담당 임원은 “10억원 이상 하는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이고 저금리를 이용한 은행대출이 많다”면서 “최근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고 금리인상 가능성까지 나오자 위기감 때문에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액 자산가 중에는 한국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국내 자산을 정리해 해외로 반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시중은행 외환담당자는 “환율이 1140원대까지 떨어졌던 3, 4월 국내 자산을 해외로 가져가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면서 “최근 화폐가치 절하(디노미네이션) 논의까지 흘러나오면서 국내 자산 정리를 문의하는 상류층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사는 주부 장모씨(34)는 “옷이나 액세서리는 해외여행을 나갈 때 면세점에서 주로 산다. 굳이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 눈치 보면서 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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