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금융자산 20억원은 수시입출금식예금(MMDA), 3개월 정기예금 등 초단기상품으로 구성돼 있다. 한마디로 ‘부동산 투기 등을 위한 대기성 자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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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지방의 소비와 유통 |
은행은 김 사장의 돈과 같은 자금을 따로 모아 국공채 투자 등에 운영 중이다. 수시로 돈을 찾아가기 때문에 기업 등에 장기간 빌려줄 수 없다. 결국 김 사장의 돈은 채권시장과 부동산을 왔다 갔다할 뿐 산업현장 근처에는 가지 않고 있는 셈.
한국은행 김민호 통화운영팀 차장은 “(김 사장 돈처럼) 만기 6개월 이하 단기자금은 4월 평균잔액으로 367조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화증권 조사에 따르면 총수신액(보험사 제외) 대비 단기자금 비중은 3월 말 42.47%에 달해 지난해 말 42.19%보다 0.28%포인트 증가했다.
▽투기열풍에 휘말린 시중자금〓은행 예금 위주로 돈을 관리해온 보수적 중산층들도 김 사장과 같은 부동산 투자 성공사례에 자극 받아 부동산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실질 예금금리가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 자체가 손해인 것도 결정적 요인이다.
우리은행 김인응 재테크팀장은 올 들어 예금 1억원 이상 10억원 미만의 보수적 예금주들로부터 “지금이라도 부동산 투자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김 팀장은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은 부동산에서 돈을 빼내고 있다. 증권사 객장에 아기 업은 아줌마가 나타나면 파국이 예상되듯 부동산 시장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라며 고객들에게 신중론을 펴고 있다.
부동산 투자가 부담스러운 고객들 중 상당수는 고위험 고수익 금융상품으로 몰려가고 있다. 국민은행 고객인 최모씨(45·서울 양천구)는 부동산으로 돈을 번 친구들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최씨는 “몇 년 전만 해도 5억원 예금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했지만 실질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서 정말 위기감을 느낀다”며 “그렇다고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에 나서자니 불안해서 고금리인 하이브리드채권 매입 쪽으로 투자방향을 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테크 전문가들은 하이브리드는 30년 장기 투자상품인 데다 완전한 후순위채여서 해당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낭패를 당한다고 경고한다.
부산의 정모씨(62)는 부산지역에서 활개 치는 사설금융기관을 찾았다가 아예 원금을 날렸다. 정씨는 “퇴직금 3억원을 은행에 넣어 놓고 이자로 생활해왔는데 저금리로 원금이 줄어들면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정씨는 은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돈을 빼 연리 10% 이상을 제시한 이른바 ‘파이낸스회사’에 투자했다가 그 회사가 망하면서 빈털터리가 된 것.
아예 돈을 해외로 돌리는 사례도 늘어나는 추세다.
모 시중은행의 프라이빗뱅킹(PB) 고객인 박모 회장(45·서울 서초구)은 중견기업을 경영하고 있고 금융자산만 200억원이 넘는다. 박 회장은 최근 PB센터에 예금 중 50억원을 미국 국공채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마디로 원화에서 달러로 자산의 통화구성을 바꾸겠다는 것.
은행 담당자는 “박 회장에게 환위험을 경고하자 그가 ‘이봐요, 재테크 전문가라면서 환위험만 생각하고 한국 리스크는 고려 안 해요’라며 면박을 줬다”고 털어놓았다. 그 은행원은 현재 미국의 뮤추얼펀드 상품을 알아보고 있다.
박 회장이 맡긴 돈은 미국의 금융시장을 위해 일하게 된다. 국내 부동산 투기로 몰리는 돈은 그나마 복덕방이라도 먹여 살리지만 외국으로 빠져나간 돈은 국내경제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기업도 30조원 놀린다▼
▽일단 현찰로 쌓아두고 있다〓기업이 투자를 해줘야만 건전한 성장도 가능하고 부동(浮動) 자금을 흡수하면서 부동산 투기 우려도 줄어든다. 하지만 갈수록 기업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
중견기업의 최모 사장은 “일단 현금을 쌓아 놓고 투자기회를 보고 있지만 국내에는 수익성 있는 사업이 없는 것 같다”며 “중국과 동남아 등에서 신규투자 기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올 3월 말 현재 488개 12월 결산 상장법인의 현금보유액은 20조5276억원(1개사 평균 421억원)으로 작년 12월 말 16조13억원에 비해 4조5262억원(28.3%)이나 늘었다.
특히 제조업체의 현금보유액은 14조2047억원으로 39.8%(4조475억원)나 증가해 비(非)제조업체의 8.2%(4787억원)에 비해 증가폭이 훨씬 높았다. 제조업체일수록 현금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증권거래소는 작년 말 기업의 현금과 단기금융상품(만기가 1년 이내로 현금화가 용이한 자산)이 30조원에 이를 정도라고 밝혔다.
은행 예금이 단기화하다 보니 기업 빚도 단기화하고 있다.
은행 대출 가운데 장기 설비투자자금 비중은 98년 16.8%에서 2003년 1월 11.6%까지 떨어졌다. 단기자금 대출비중은 98년 82.9%에서 1월에 88.3%까지 올라갔다.
굿모닝증권의 ‘차입금 기간구조와 장기 회사채’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업을 제외한 분기보고 대상 941개 기업의 전체 차입금 가운데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99년 4·4분기 40.7%, 2000년 4·4분기 45.5%, 2001년 42.0%로 40%를 웃돌고 있다. 해마다 전체 차입금의 40%를 갚거나 차환 발행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정기 우리은행 기업영업 지점장은 “성장이란 번데기 상태인 자금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자본, 즉 나비로 바뀌어 움직이는 것”이라며 “지금처럼 돈이 번데기 상태에 머무른다면 기업 활동이 위축되면서 국민경제가 주저앉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채권-금융상품 활성화 기업으로 돈물꼬 돌려야▼
400조원으로 추산되는 시중의 단기자금이 부동산 쪽으로 흐르자 정부도 비상이다.
금융연구원 박재하(朴在夏) 연구위원은 “개인들이 여윳돈을 다양한 금융상품과 채권에 투자하고 이 돈이 산업자금으로 흘러야 하는데 이 흐름이 막혀 있다”며 “이는 금융권의 자금중개 기능이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카드회사 부실과 SK글로벌의 분식회계로 촉발된 금융시장 혼란에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치면서 시중자금이 혈관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LG경제연구원의 신민영(申민榮) 박사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서 이자소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부동산 쪽으로 몰려가고 있다”며 “경제주체들이 경제 전망과 금융시장에 대해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자금의 선순환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메릴린치의 이현승 컨설턴트는 “당국은 최근 금리인하로 돈을 푸는 방법을 썼지만 이 돈은 부동산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며 “돈의 총량(volume)이 아니라 돈의 흐름(channeling)이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금리를 유지해 부동산을 안정시키는 대신 경기는 재정정책으로 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한 고위간부는 “기업에 왜 투자하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투자를 망설이는 근본원인을 없애야 한다”며 “적어도 노사문제에 대해 마음을 놓게 되고 정부정책의 일관성과 투명성을 회복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확실한 처방”이라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기업과 금융 분야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 채권시장 활성화라는 각론으로 접근해야 돈의 흐름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채권시장 활성화는 시중에 떠다니는 부동(浮動)자금을 흡수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
정부도 자금의 선순환이 시급하다고 판단, 시스템 보완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이정재(李晶載) 금융감독위원장은 “5년 동안 기업여신이 2∼3%밖에 안 늘었다”며 “이는 한국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이 위원장은 “감독당국에서 기업여신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걸림돌을 없애는 정책을 마련 중”이라며 자금의 선순환이 하반기 금융정책의 우선순위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연수 임규진 홍찬선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박중현 홍석민 신치영 이헌진 이나연기자
▽사회1부=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기자
▽사회2부=차준호 남경현 황금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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