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에서 기업을 상대하는 맹모(41) 팀장은 얼마 전 한꺼번에 5개 업체를 유치했다. 상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맹 팀장은 성과 자체보다 상사가 인정해준 점이 더 기뻤다. 당시 성과가 상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다른 은행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맹 팀장은 “상사로부터 인정과 격려를 받을 때만큼 직장인이 힘이 나는 때도 없다”고 말했다.
반면 한 중견기업 전략파트에서 일하는 정모(34) 대리는 새해 직장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헤드헌팅 업체에 등록하고 밀쳐 뒀던 토익 참고서를 다시 꺼내든 것은 순전히 직속상관 때문이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 해외시장 관련 보고서를 만들어 냈더니 10여 분 뒤에 과장이 불렀다. “철자가 틀렸네. 다시 쓰지.” 다시 해갔더니 이번엔 “띄어쓰기 몰라?” “무슨 표를 이따위로 그리나” 같은 지적이 돌아왔다. 표 디자인 수정, 쓸모없는 보조자료 첨부까지 합해 20여 차례 고친 보고서는 그대로 부장에게 올라갔다.
그가 이직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 다음 날. 회의에 다녀온 부장이 정 대리의 보고서를 칭찬하자 과장이 의자를 빙글 돌려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그거 만드느라고 제가 며칠 동안 거의 집에 못 갔잖아요.”
정 대리는 “윗사람들이 직장을 옮길 땐 비전, 대우와 관련이 있겠지만 우리 급은 대부분 인간관계, 특히 상사와의 갈등 때문”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의 만족도는 개인의 행복감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지난해 말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직장인 5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4명이 ‘인간관계 때문에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대답했다. 직장에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상사’(34.9%)가 가장 많았다.
지난해 말 직장인의 행복을 주제로 그룹 토론이 열린 서울 동작구의 한 중소기업 회의실. ‘직장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칭찬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일하고 욕이나 안 들으면 그게 최고….”(이모 씨·32)
“좋은 상사를 만나야 행복하죠. 윗사람이 비합리적이면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권모 씨·35·여)
상사와의 관계가 ‘직장 행불행’의 가장 큰 요인이 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이다.
서울백병원 우종민(禹鍾敏·신경정신과) 교수는 “선진국에서 상사는 부하직원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존재인 반면 한국에서는 직접적 스트레스의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적 조직문화가 여전한 데다 상하 간 적절한 대화창구가 없는 경우가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하나은행 CS(고객만족)팀의 장영주(29·여) 씨는 “낯선 일을 맡아 마음고생하고 있는데 이전 상관이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다’며 격려전화를 해준 적이 있다”며 “나를 믿어 주고 일을 맡겨 주는 것이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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