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마케팅팀 주도로 태어난 ‘뉴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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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7일 02시 30분


디자이너, 현장감각 잊지 말아야

세련된 디자인의 신차 홍수에 밀리던 폴크스바겐의 ‘비틀’은 1998년 마케팅팀 주도로 ‘뉴 비틀’을 내놓으면서 예전의 명성을 이어갔다. 당시 뉴 비틀은 기존 디자인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최신 유행을 담아냈다는 호평을 얻었다. 사진 제공 폴크스바겐
세련된 디자인의 신차 홍수에 밀리던 폴크스바겐의 ‘비틀’은 1998년 마케팅팀 주도로 ‘뉴 비틀’을 내놓으면서 예전의 명성을 이어갔다. 당시 뉴 비틀은 기존 디자인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최신 유행을 담아냈다는 호평을 얻었다. 사진 제공 폴크스바겐
디자인의 숨은 기능이 하나 있다. 마케팅팀과 연구개발(R&D)팀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기업의 제품개발 능력을 극대화하는 기능이 그것이다. 마케팅 부서는 시장 변화를 측정하고 분석해 틈새시장을 찾아내며 경쟁자와의 차별화를 노린다. 이를 토대로 디자인팀이나 R&D팀에 제품개발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R&D 부서는 신소재나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제품을 개발한다. 소비자의 욕구도 고려하지만 R&D 부서의 속성상 기술중심적으로 자유롭게 사고해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디자인팀은 이 두 부서와 함께 일한다. 마케팅팀과 일한다는 것은 마케팅팀에서 설정한 목표를 위해 디자인팀이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시험구매 유도’, ‘제품 사용량 늘리기’, ‘브랜드 인지도 높이기’ 등과 같은 마케팅 목표가 설정되면 디자인팀은 시인성 높은 패키지 디자인을 만들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거나 반복적 형식의 메시지 디자인으로 시험구매를 유도하려 할 것이다.

상품속성이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준다면 최신 유행을 파악해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상품속성을 개선할 것이다. 소비자들의 오랜 사랑을 받았지만 신차 홍수에 밀리던 폴크스바겐의 비틀 시리즈는 1998년 마케팅팀 주도로 ‘뉴-비틀 시리즈’를 추진해 시장점유율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윤곽을 날렵하게 하고 제품속성도 다채롭게 한 이 디자인은 기존 디자인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최신 유행을 담아냈다.

R&D팀과 일하는 디자인팀은 디자인 창발과정을 통해 새로운 소재나 메커니즘 개발을 R&D팀에 의뢰할 수도, 역으로 R&D팀에서 넘어 온 신소재나 메커니즘을 이용해 디자인을 할 수도 있다. 디자인 창발과정과 엔지니어들의 창발과정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아 두 팀을 한데 묶어 제품을 개발토록 하는 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일전에 소개한 바 있는 사이클론 청소기업체 다이슨사가 대표적이다. 다이슨사는 엔지니어들에게 디자인 교육을 시켜 R&D에 디자인 기능을 더한다.

그러나 R&D 주도적인 제품개발은 혁신성은 높지만 목표로 삼을 만한 시장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마케팅 주도적인 디자인팀에서는 현실적이고 즉시 이익을 낼 제품이 개발되기 쉽지만 혁신적인 제품개발을 통해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는 쉽지 않다.

최근 많은 경영자가 주목하고 있는 디자인의 역할은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온다. 두 팀 사이의 균형추 역할을 디자인이 맡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디자인팀이 시장중심적이어서 혁신성이 떨어지는 마케팅팀의 아이디어에 참신성을 더해주고 반대로 기술중심적인 R&D팀의 아이디어는 시장중심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근 홈쇼핑을 통해 대박을 터뜨린 자동탈수식 대걸레 ‘비바크린’은 이 두 방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사례다. 물걸레로 청소를 마무리하고픈 주부들의 욕구와 물걸레질의 불편함 해결을 핵심 마케팅 포인트로 파악한 점, 상세하게 제품설명을 할 수 있는 홈쇼핑을 통해 광고하고 통신판매로 유통비를 줄였으며 가격을 진공청소기의 3분의 1 수준으로 결정한 점 등 마케팅 전략이 훌륭했다. 반면 걸레 교체와 세탁 문제를 극미세사 소재의 걸레와 원심력을 이용한 탈수방식으로 해결한 대목은 R&D팀의 공으로 보인다. 물론 엄청난 공학적 지식이 필요한 문제해결책은 아니지만 이 덕에 저렴하고 조작이 쉬운 시장중심적인 상품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디자인과정이 마케팅과 R&D를 적절히 매개해준 것이다.

디자인이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마케팅과 공학을 알아야 한다. 국내 디자이너들의 경우 뭔가 만들기 좋아하는 성향 덕인지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공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문제는 마케팅이다. 디자이너들도 마케팅의 중요성을 알고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지만 현장감이 부족하다. 공학은 책이나 실험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마케팅은 그렇지 않다. 이 숙제를 해결할 사람은 경영자밖에 없다. 판매현장의 느낌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하거나 순환근무토록 해 마케터들과 디자이너가 서로 일하는 방식에 익숙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디자인은 판매현장과 R&D팀을 연결하는 정보의 터미널 혹은 정보의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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