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주도형 성장동력 발굴엔 한계… 기업 중심으로 전환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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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새 성장판 열어라/1부 끝]<6>기업이 먼저 나서 ‘미래먹거리’ 찾아야
[2016 연중기획]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은 지난해 세계 2위 가전업체인 스웨덴 일렉트로룩스와 3조9000억 원에 가전사업부를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비록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 규제로 인해 매각이 일단 무산됐지만 GE는 “사업을 계속하며 다른 인수자에 매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매각이 성사되면 과거 세계적인 가전제품 회사였던 GE는 가전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또 GE는 한때 매출의 50%를 차지했던 금융사업의 비중도 줄이고 있다. 그 대신 터빈, 엔진 등 발전시설 인프라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동시에 소프트웨어 분야 진출도 가속화하고 있다. 제프리 이멀트 GE 회장은 2020년까지 GE를 세계 10대 소프트웨어 회사로 키우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 기업 중심의 성장동력 찾기

지난 10년간 GE의 주력사업은 ‘가전→금융→발전시설 인프라→소프트웨어’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GE는 성장이 한계에 부닥치기 전에 기존 사업을 신속히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에 선제적으로 뛰어드는 방식으로 무수한 경영위기를 극복해왔다. 새로운 먹거리는 정부가 정해준 것이 아니었다. GE가 자체 기업역량과 위험 요소, 현재 사업군의 전망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다른 미국 기업들의 움직임 역시 GE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화학업체인 다우케미컬은 회사의 주력사업인 염소, 에폭시 수지 등 범용 화학제품을 과감히 정리하면서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농업 생명공학, 특수 화학제품 사업 등 새로운 사업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회사 이름에서 ‘케미컬’을 빼는 것까지 검토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역할은 개별기업이 신성장동력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공유하고 이를 줄이는 것에 한정됐다.

반면 한국은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로 유망 산업을 선정하면 기업들이 이를 할당받아 집중 투자를 하는 성장전략을 구사해왔다. 주력산업이 정체되면 정부가 과감하게 메스를 휘둘러 산업을 재편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이 탄생했고, 외환위기가 남긴 상처에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이와 같은 성장공식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발표한 신성장동력 발굴 정책만 세 차례에 이른다. 정권에 따라 차세대 성장동력(노무현 정부), 신성장동력(이명박 정부), 미래성장동력(박근혜 정부)으로 이름은 달랐지만 ‘성장 가능성이 있는 산업을 정부가 육성하겠다’는 기본 방향은 똑같았다.

○ 기업이 주연… 정부는 조력자

하지만 이제 정부 주도의 미래 먹거리 찾기는 한계에 부닥친 상황이다. 국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개별 기업의 역량이 과거에 비해 크게 향상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가 지시한 방향만 좇던 조선 해운 석유화학 철강 건설 등 취약 업종 기업들은 자체 생존능력을 잃고 ‘좀비기업’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지능형 로봇, 스마트 기기, 스마트자동차 등을 신성장산업으로 제시했지만 정작 해당 사업을 맡아야 할 기업들의 사정은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구호성 다짐’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혁신을 통해 스스로 신성장동력을 찾는 ‘기업가형 국가’ 모델로 전환하고 정부의 역할은 조력자에 그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혁신 과정에서 실패한 기업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으로 규제 방식도 일단 규제를 해놓고 보는 ‘사전적 규제’에서 사업을 허용한 뒤 추후 문제가 생기면 규제하는 ‘사후적 규제’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기업가형 국가 모델이 ‘기업 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는 “대기업이 중소기업들의 기술을 약탈하거나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는 행위에 대한 정부의 적절한 개입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 정부 연구개발(R&D) 패러다임 전환

연간 18조 원에 이르는 정부 연구개발(R&D) 투자의 패러다임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 정부가 정한 차세대 선도 산업에 직접 투자를 하거나 국영기업을 만드는 일이 더이상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장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정책연구소장은 “인터넷과 정보기술(IT) 등 민간기업이 투자해 단기간에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개발연구에는 과감하게 투자를 줄이고, 당장 기초와 원천연구 분야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경기 변동과 무관하게 기업들이 꾸준히 R&D 투자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정부의 역할이 집중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선 한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R&D 조세감면 제도를 확대하는 등 기업의 R&D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업이 선제적으로 R&D에 나서면 정부는 해당 산업의 인적자원에 대한 지원과 함께 산학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해외 연구개발 재원의 유입을 확대하거나 예산을 신산업 연구기관에 직접 배정하는 등의 규제 완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 한국 제조업, 고비용 구조 고쳐야 살아남아 ▼

美-獨-中-日 제조업 살리기 박차… 한국도 주력산업 혁신 서둘러야


최근 한국 경제의 저성장 근간에는 주력산업의 부진이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던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의 제조업은 미국 중국 일본 등 경쟁국에 치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굴뚝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철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연구실장은 “전기자동차나 신소재 같은 신성장동력 산업도 기존 주력산업에서 가지 쳐 나오는 것”이라며 “주력산업을 안정적인 캐시카우(수익 창출원)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신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한국경제연구원이 내놓은 ‘대한민국 주력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매출증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해운업의 경우 일본과 중국의 매출증가율은 2011년부터 성장세로 돌아섰지만 우리나라는 2010년 40.08%에서 이후 추락하기 시작해 2014년에는 전년 대비 ―16.53%를 기록하는 등 상반된 추이를 보였다.

이런 와중에 선진국들은 주력 제조업 혁신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독일은 ‘인더스트리4.0’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사물인터넷 등의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제조업의 전 생산공정을 디지털화하는 게 핵심이다. 중국의 ‘자주창신(自主創新)’이나 일본의 ‘산업재흥플랜’, 미국의 ‘리메이킹 아메리카(Remaking America)’ 등의 경제정책도 제조업 혁신으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게 목표다.

한국도 한발 늦었지만 제조업 혁신에 뛰어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제조업 혁신 3.0 전략’을 핵심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설계 생산 유통 등 제조 전 과정에 ICT를 접목해 최소 비용과 시간으로 고객 맞춤형 제품을 생산하는 ‘스마트공장’이 대표적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12월까지 총 1240개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사업을 추진해 875개를 완성했고, 365개를 진행 중이다.

주력 제조업의 성장성과 수익성 개선을 위해 고비용 생산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동차의 경우 매출액에서 원가가 차지하는 비율인 매출원가율이 2014년 86.45%로 미국(82.66%) 일본(76.05%) 중국(80.99%)보다 높았다. 신현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생산설비를 효율적으로 바꾸고 노동규제 개혁 등을 통해 고비용 생산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국내 자동차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계속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종=손영일 scud2007@donga.com·박민우 기자
세종=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경제#정부주도형#성장#기업#제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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