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 핀란드 헬싱키 도심의 벤처기업 ‘마스(MaaS)’ 사무실. 창업한 지 며칠 안 돼 텅 빈 사무실의 홍보 스크린에 이런 메시지가 떠 있었다. 매달 정해진 회비를 받고 영화나 드라마를 무제한 제공하는 미국 회사인 넷플릭스처럼 정액요금을 받고 서비스 가입자들이 택시, 버스, 지하철, 렌터카 등 다양한 교통서비스를 입맛에 맞게 이용하게 하는 ‘정액제 교통 패키지 상품’을 내놓겠다는 뜻이다.
사무실 벽에 붙은 대형 포스터에는 미국, 한국 등 해외 시장별 특성과 전략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삼포 히타넨 마스 최고경영자(CEO)는 “마스를 핀란드의 대표 수출기업, 나아가 제2의 노키아로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노키아의 부진 등 제조업의 몰락을 겪은 핀란드는 최근 세계 최초의 ‘콜버스’, ‘콜택배’ 등의 혁신적인 ‘모빌리티(이동성) 서비스 산업’으로 부활을 꾀하고 있다. 수출 동력이었던 제조업의 빈자리를 교통 분야의 창조산업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중앙정부는 국가대표 기업 노키아의 몰락 이후 낡은 법과 제도를 과감하게 뜯어고치며 ‘노키아 쇼크’ 극복에 나섰다.
○ 노키아의 후예들, 모빌리티 벤처 키운다
핀란드에서는 노키아 출신 젊은 인재들이 모빌리티 벤처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이들이 모빌리티 산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교통서비스가 소비자 맞춤형으로 변하며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 기회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시장 규모나 인프라도 넉넉하다. 마스의 히타넨 대표는 “유럽에서 교통은 주거 다음으로 규모가 큰 소비 시장”이라며 “그만큼 시장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교통산업은 이미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있는 자원을 활용하기만 하면 돼 투자비도 크게 들지 않는다.
핀란드의 모빌리티 벤처는 일자리를 늘리고 지역경제도 살리고 있다. 노키아 출신 인재들이 세운 벤처 ‘피기배기’가 대표적이다. 이 벤처기업은 ‘콜택배’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비스 가입자들이 앱으로 택배 보낼 곳을 요청하면, 그 방향으로 가는 다른 가입자가 요금을 받고 택배를 배송해 주는 ‘O2O(온·오프라인 연계)’ 서비스다. 하리 팔로헤이모 대표는 “은퇴 노인들이 서비스를 이용해 배송비를 벌고 있다”며 “농촌 지역 10개 농장도 이런 방식으로 산지의 농산품을 도시로 배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 정부는 지난달 파격적인 ‘교통법(Transport Code)’ 개정안을 마련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콜버스 같은 벤처기업들이 면허를 쉽게 받도록 기업 친화형 택시 면허제가 생긴다. 지역별 택시 총량 및 운행 지역 제한도 없애 모빌리티 기업들이 시장을 키우도록 했다. 또 교통수단별 호환이 가능하도록 티켓과 결제 시스템이 마련된다. 소비자들이 하나의 디지털 티켓으로 버스, 지하철, 트램 등을 편리하게 탈 수 있다. 이호 한국교통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도 새로운 사업이 활성화되도록 ‘미래교통산업 특별법’ 등을 제정하고 모빌리티 벤처 공모전 등을 통해 신산업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제주도 등에 모빌리티 시범단지 필요
핀란드가 주도하고 있는 ‘모빌리티 서비스 산업’은 세계적 흐름이 됐다. 스웨덴 예테보리의 모빌리티 벤처기업 ‘유비고’는 2014년 70가구를 대상으로 매달 요금을 내고 대중교통, 카 셰어링 등을 이용하는 교통 패키지 상품을 선보였다. 현재 후속 사업을 준비 중이다. 미국의 ‘스마트’, 오스트리아의 ‘스마일’ 등도 비슷한 서비스다.
교통시장 환경이 급변하다 보니 모빌리티 서비스 산업의 개념, 사업 및 서비스 모델 등을 국제 표준화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 이미 모빌리티 서비스 산업의 표준화를 논의 중이고 국제기구도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문영준 한국교통연구원 교통기술연구소장은 “시민들이 대중교통 일정에 따라 움직이던 교통 개념을 시민의 필요에 맞게 움직이는 모빌리티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 제주도 등 일부 지역, 특정 시간대에 모빌리티 서비스 산업을 시범적으로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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