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을 조국에 남기고 싶다”… 세계적 관광 인프라 실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7일 03시 00분


[동아일보 100년 맞이 기획/한국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9> ‘기업보국’ 꿈 이룬 글로벌 롯데

“새롭게 한국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傾注)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1967년 4월 롯데제과가 세워진 지 한 달 후, 신격호 당시 롯데제과 사장은 신문지면에 ‘약진하는 롯데’라는 제목의 전면광고를 게재하며 인사말도 함께 실었다.

일제강점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일본으로 떠난 청년 신격호가 가진 돈은 단돈 83엔. 그로부터 25년 후, 40대 중반이 된 청년은 성공한 재일사업가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모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열망은 ‘기업보국(企業報國·기업을 통해 국가에 기여한다는 뜻)’이라는 기업 이념이자 현실이 됐다.

○ 위기 때 투자하라…원칙 경영 위기 속에 빛나

1967년 자본금 3000만 원으로 시작한 식품회사(롯데제과)가 식품, 유통, 화학, 건설, 호텔, 금융 등 총 87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5위로 퀀텀점프 한 배경에는 스스로 세운 경영 원칙을 어떤 위기에서도 밀어붙이는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한국 경제의 고비 때마다 사업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사업 시작부터 고수했던 무차입 경영이었다. 1970년대 국내 많은 기업들이 관행처럼 차입금에 의존해 사업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라는 창업주의 원칙은 경제 위기 속에서 빛을 발했다. 1997년 말 전국이 외환위기에 휩싸일 때 대부분의 계열사가 부채 비율 100%를 넘지 않는 건실한 재무구조 덕분에 롯데는 외환위기 이후 마트 시장 진출, 프리미엄 아웃렛 출점, 롯데케미칼 3PE 증설, 롯데제이티비 설립 등 대부분의 투자를 계획대로 추진했다.

2000년대 후반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내수시장도 장기 침체의 조짐을 보일 때도 롯데는 ‘글로벌 경영’으로 또 한번 사업의 보폭을 키워 나갔다. 2011년 회장으로 취임한 신동빈 회장은 특히 인수합병과 해외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책본부장으로 취임한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성사시킨 인수합병 건수가 40건에 달했다. 이를 통해 롯데는 고속성장을 이루게 됐다.

○ 집요한 열정으로 이뤄낸 기업보국의 꿈

창업주는 열정과 집념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랜드마크를 세우고 기간산업에 투자하고 싶다는 뜻을 이루며 기업보국의 꿈을 실현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고국으로 돌아와 줄곧 투자하고 싶었던 분야는 제철과 석유화학이었다. 기간산업이 부족한 고국에 국가 경제의 기틀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제철산업의 국유화가 추진되며 그는 잠시 뜻을 접고 식품회사(롯데제과)를 세웠다.

1978년 정부가 매각한 호남석유화학을 이듬해인 1979년 인수하며 신 명예회장은 마침내 기간산업에 투자하고 싶은 꿈을 이루게 된다. 이후 1970년대 롯데기공, 롯데파이오니아, 롯데건설, 롯데상사, 1980년대 대홍기획과 롯데물산 등의 계열사를 잇달아 세우며 회사의 몸집을 불렸다. 1995년 부산할부금융(현 롯데캐피탈)을 출범하며 금융 산업에 진출한 이후 롯데는 롯데카드, 롯데손해보험, 롯데캐피탈 등으로 금융사업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먹을거리, 볼거리, 살거리, 놀거리를 만들어 고국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은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남아있다. 그는 “훌륭한 예술작품을 조국에 남기고 싶다”며 “해외에서도 한국을 찾는 세계적인 관광 인프라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시작은 특급 호텔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1974년 반도호텔을 인수했다. 인수한 호텔에 대한 공사 작업에는 5년이 걸렸고,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맞먹는 1억5000만 달러(약 1725억 원)가 투입됐다. 1979년 문을 연 롯데호텔은 국내 최고층 빌딩(지하 3층, 지상 38층)이었다.

그는 이어 1984년 서울 잠실 일대에 롯데월드, 호텔, 백화점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이른바 ‘잠실 프로젝트’는 임직원의 반대에 부딪혔다. 허허벌판인 잠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것 자체가 파격이고 모험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이제 한국의 관광산업은 볼거리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수준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1989년 문을 연 롯데월드는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테마파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2017년 4월 문을 연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신 명예회장이 30년 이상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그가 잠실 일대에 부지를 매입한 시점이 1987년, 공사를 시작한 게 2010년이다. ‘노른자 땅을 놀리느니 차라리 아파트를 짓자’고 임직원들이 주장했지만 그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시설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123층 롯데월드타워는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 면세점-패스트푸드점 국내 처음 선보여 ▼

까르띠에-티파니-불가리 등 명품… 면세점에 유치한 건 세계최초 기록

1979년 서울 중구에 문을 연 롯데백화점 본점 매장 바닥에는 이탈리아산 고급 바닥재가 깔렸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환상적인 쇼윈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매장 내 각종 편의시설은 다른 백화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국내 백화점에 처음 설치된 분수대는 ‘애천’이라 불리며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졌다. 국민의 의식이나 소득 수준에 비해 백화점 시설이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한국의 대표 유통기업인 롯데는 백화점을 비롯해 면세점, 호텔, 패스트푸드점을 통해 국내 최초의 다양한 시도를 했다. 1980년 1월 문을 연 롯데면세점은 당시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 종합면세점으로 개점과 동시에 화제를 모았다. 특히 ‘3대 명품’으로 꼽히는 루이뷔통, 샤넬, 에르메스 모두 유치한 것은 국내 최초였다. 까르띠에(1989년), 티파니(1991년), 불가리(1993년)를 면세점에 유치한 것은 세계 최초로 기록된다. 한곳에서 세계적인 명품을 원스톱 쇼핑할 수 있다는 점은 당시 일본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1979년 10월 문을 연 롯데리아 1호점인 소공점은 한국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의 효시였다. 1970년대 말 국내에는 국내 산업 보호 정책에 따라 서구식 패스트푸드점이 전무했다. 이렇게 등장한 롯데리아는 큰 성공을 거두며 시내 곳곳에 가맹점을 열었다. 이후 웬디스, 버거킹 등 미국 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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