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살아보니]폴 맥널리/예절의 나라 맞나?

  • 입력 1999년 5월 18일 19시 06분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한국은 분주하다. 한국인들은 경기불황이 가져온 온갖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다.

이러한 경쟁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쟁이 엉뚱한 모습으로 표현될 때도 있다.

얼마 전 서울 정동 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었다. 앞에 정지한 택시 문을 열기 위해 뻗은 내 손을 앞질러 다른 손이 번개처럼 문을 열었다. 당연한 듯 새치기한 두 남녀를 태운 택시는 이내 출발했다. 어정쩡하게 서서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옆에 있던 한국 친구들은 “내버려 둬.

늘 있는 일인데 뭐. 널린 게 택시잖아”라며 사람 좋게 웃어 넘겼다. 한국처럼 예(禮)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이게 웃고 넘길 일이라니….

한국인 직원들과 친구들은 서울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밀고 밀리고 새치기 당하는 것에 대해 내성(耐性)이 생긴다고 얘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술 더 떠 “이러한 ‘경쟁’은 바쁘게 사는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요소”라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자기합리화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몇 주 전 일요일. 서울 도심의 한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가 곧 백화점에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세일기간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을 가득 메웠다. 통로를 걸어다니면서 우리 가족은 쉴새없이 밀리고 부딪히고 밟히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누구 하나 “미안하다”고 말을 하거나 사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없었다. 흡사 백화점 안의 사람들은 온갖 장애를 헤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군인’들과도 같았다.

택시를 탈 때나, 백화점에서는 그나마 ‘목적’이라도 있다. 얼마 전 한가한 길거리에서 유럽 친구들 3명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한국인이 그 넓은 길에서 오직 ‘자기가 직선으로 걷는 코스’에 우리가 서 있었다는 이유로 유럽인 친구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은 잠시 후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걸어오면서 우리 일행을 또 치고 지나갔다.

“실례했습니다”라는 말은 못알아 듣는 언어로 해도 뜻이 통한다. 뻥 뚫린 길이었을지언정, 그 사람이 이 한마디만 했더라도 우리는 화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을 금으로 여기는 한국인들이 이 사소한 한 마디를 너무 아끼는 바람에 ‘한국인은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이 많아지는 것이다.

서울처럼 복잡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밀치지 않고도 잘 사는 도시는 세계에 얼마든지 있다. 서로 밀치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만으로도 서울이 수준 높은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연히 부딪쳤을 때 “미안하다”고 서로 사과하는 모습을 서울에서 보게 될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새 밀레니엄을 향해 ‘앞 다투어’ 뛰기만 하다 보면 한국의 문화수준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폴 맥널리<그랜드하얏트호텔 객실담당 이사>

▽약력 △5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유레카시 출생 △훔볼트 주립대 졸업 △하얏트리젠시마우이 하얏트리젠시비버크릭 하얏트산호세 등에서 근무 △97년∼현재 그랜드하얏트서울 객실담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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