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50년만에 평양서 北스승-南제자 상봉

  • 입력 2000년 9월 24일 21시 01분


21일 밤 평양 고려호텔에서는 남북 기생충학자들간에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북한어린이돕기사업(한민족복지재단 동아일보 공동 주최)을 위해 방북한 남측 학자들이 250만 북한어린이를 상대로 한 구충사업을 위해 북한 학자들과 처음으로 머리를 맞댄 것.

이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의 내일을 짊어질 어린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효과적인 구충사업이 시급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논의는 진지했고 정치나 이념이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이 자리에는 남북으로 갈려 반세기 동안 만나지 못했던 스승과 제자도 있어서 의미가 더 깊었다. 임한종(林漢鐘·69·고려대 명예교수)한국건강관리협회장은 스승인 조선기생충학회장 나순영(羅順榮)박사교수를 만나 감격의 포옹을 했다.

해방 직후 서울대의대 조교수였던 나교수는 일본학자들이 돌아가 국내에 기생충학자가 전무한 상태가 되자 전공이었던 소아과를 포기하고 기생충학에 몸을 던진 한국 기생충학계의 1세대 학자.

그는 임회장의 경성제1공립고등학교(경기고의 전신)와 서울대의대 14년 선배로 임회장으로 하여금 기생충학자가 되도록 만들었던 인물로 북에서도 기생충 박멸의 공로로 남쪽의 학술원 후보회원에 해당하는 후보원사에까지 올라 있었다.

임회장은 나교수를 보고도 처음에는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혹시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해서였다. 다행히도 나교수와 함께 나온 조선의학협회 인사가 “나선생은 서울대의대에서 교수를 하신 분…”이라고 소개를 해 두 사람은 사제지간임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임회장은 나교수를 만나고 난 뒤 나교수가 북으로 가게 된 일화를 이렇게 들려줬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영국인 교수로부터 선물로 받은 클라리넷을 애지중지했다. 6·25가 나자 서울에 들어 온 인민군이 악주단에 클라리넷이 필요했던지 선생님께 클라리넷을 잠시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생명과도 같은 클라리넷을 빌려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내가 직접 가서 불어주겠다며 나갔다. 이후 선생님을 뵐 수가 없었다.”

<평양〓문철기자>fullmo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