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타계한 그레이엄 WP紙 회장 '언론계의 여걸'

  • 입력 2001년 7월 18일 18시 31분


“캐서린은 냉철하지만 부끄럼이 많고, 강하지만 교만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7일 타계한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회장(84)을 애도하며 “사업가로서의 정확한 판단력과 여성으로서의 겸손함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부시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올해 초 워싱턴에 입성했을 때 그레이엄 회장이 첫번째 만찬을 베풀어 줄 정도로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그레이엄 회장은 1917년 뉴욕에서 월가의 은행가 출신 아버지와 기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역임한 그레이엄 회장의 아버지 유진 메이어는 33년 부도 직전의 워싱턴포스트를 82만5000달러에 인수했다. 그레이엄은 아버지에 이어 회사를 경영하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이 63년 우울증으로 자살하자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워싱턴 정가와 신문업계에서는 그레이엄 회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그러나 그레이엄 회장은 편집권을 절대 존중하는 경영 방침으로 기자들의 신뢰를 얻고 광고 판매 등 영업 부문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이후 40여년 동안 미 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레이엄 회장이 경영을 맡은 뒤 워싱턴포스트는 지방지에서 연매출이 24억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신문으로 부상했다.

발행인으로서 그레이엄의 목표는 워싱턴포스트를 사회의 여론지도층이 읽는 신문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취임 초기 “워싱턴포스트가 뉴욕타임스와 같은 문장에서 언급되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레이엄 회장이 가진 또 하나의 성공비결은 탁월한 인재 선별 능력이었다. 그는 65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40대 벤저민 브래들리를 편집국장으로 발탁하는 파격적인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이후 30여년간 워싱턴포스트는 그레이엄-브래들리 체제하에서 수많은 특종을 발굴했다. 71년 뉴욕타임스와 함께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다룬 국방부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워싱턴포스트는 이듬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사임을 몰고온 워터게이트사건을 특종 보도하는 개가를 올렸다.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막으려는 닉슨 행정부의 협박과 이에 따른 주가 급락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엄 회장은 “우리의 임무는 발생한 사건을 보도하는 것”이라며 기자들을 독려했다.

그레이엄 회장은 미국의 여러 대통령을 친구로 뒀지만 권력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 존경을 받았다. 그는 98년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 ‘개인의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성공했다고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서 “단지 계속 도전해서 이 같은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했다.

<정미경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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