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기소르망 "세네갈 승리 기뻐요"

  • 입력 2002년 6월 2일 18시 05분


월드컵 개막식에 초청돼 이틀째 일정을 마치고 1일 저녁 막 숙소(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돌아온 프랑스의 세계적 석학 기 소르망(58)은 매우 지쳐 보였다.

"긴장이 풀린 여행 이튿날은 항상 피곤이 엄습하는 것 같다"며 쓰러지듯 푹신한 소파에 몸을 반쯤 파묻은 그가 양해를 구하려는 듯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프랑스가 세네갈팀과의 경기에서 패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아니냐"는 기자의 농담 섞인 질문에 의외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니에요. (혼잣말로) 이렇게 말해도 되나?(웃음). 솔직히 세네갈팀이 이긴 것이 내심 기쁘더군요. 세계화의 물결에서 승자는 항상 부유하고 강한 나라들이죠. 하지만 축구경기에선 아무리 가난한 나라도 챔피언이 될 수 있습니다. 카타르시스적인 쾌감이랄까. 현실에서 도저히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빈국들이 축구를 통해 승리를 맛볼 수 있는 거죠. 사실 프랑스 중상층 사이에선 축구가 그리 인기있는 스포츠가 아니에요. 축구 선수들 대부분도 빈곤층 저학력 출신들이 많습니다. 물론 98년 프랑스 월드컵이후 축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긴 했지만 당시 프랑스 정부는 월드컵 대표팀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다소 작위적이지만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산다는 '홍보' 효과를 노렸던 겁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데 홍보측면에서 실패했다고 비판하신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번 월드컵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봅니다. 개막식은 한편의 아름다운 오페라 같았죠. 한국의 전통 음악과 정서를 담은 공연에서 시작, 점차 현대적 감각의 공연으로 옮겨간 것은 매우 훌륭한 공간적 시각적 구성이었다고 봅니다."

-이번에 함께 방한하신 자크 아탈리는 일본과의 월드컵 공동개최가 문화 사회적으로 양국 간의 중요한 계기나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공동개최가 갖는 의미 성과 등은 뭐가 있을까요.

"양국 관계를 개선시키는 결정적 계기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다만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한일 양국의 관계를 말할 때 '화해(reconciliation)'라는 용어가 잘못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해라는 것은 양측이 각각 사과해야 할 잘못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죠. 그러나 일본의 역사, 음식 모두가 한국으로부터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한 쪽은 일본입니다. 하지만 일본 왕실이 자신들의 조상은 조선인이라고 인정하는 등 양국 관계의 실타래는 이미 수년 전부터 풀려오고 있다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1976년 프랑스에서 열린 백남준의 전시회를 통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획기적 사건(breakthrough)'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제 친한 친구이기도 한 백남준이 말해주더군요. TV수상기를 갖고 일하는 것은 수많은 텔레비전을 수출하는 한국의 경제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전통 한국의 모습은 과거 샤머니즘적 색깔을 사용해 표현했다고요. 전 한국 정부보다 백남준 개인이 한국에 대한 홍보대사 역할을 더 훌륭히 해 왔다고 봅니다."

-지방선거를 앞둔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한국을 아직 민주국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민주국가로 첫발을 내딛은 시간이 짧지 않습니까. 민주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democratization)에 있다고 봐야겠죠. '좌파=빨갱이'로 몰아가는 냉전 시절의 잔재도 바로 이같은 이유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끔 한국을 방문, 재벌 총수들을 만날 때마다 아직도 그들이 마치 작은 왕국의 황제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아직도 한국인들의 삶 곳곳에 남아있는 권위주의적인 문화도 걸림돌이죠. 이에 대한 자각이 한국 민주주의를 보다 빨리 뿌리내리게 하는 방법입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와 같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외국의 부정적 시각이 아직도 팽배한데….

"브리짓드 바르도는 프랑스에서 나치주의를 신봉하는 극우주의자이자 파시스트에요. 그녀를 개고기 문제나 기타 다른 문제들과 관련, 제 논쟁의 대상자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개들이 가혹하게 대우받고 도살당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나 문화적 상대주의 측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개고기 문제에 대해 우리 문화를 존중하라고 해서 해결될 성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지적입니다. 보편적으로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항상 가장 자극적인 부분들을 부각시키기 마련입니다. 서구에서는 한국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쟁과 개고기만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한국의 긍정적인 문화와 현대성을 적극 홍보하면 자연적으로 부당한 비판들이 목소리를 잃게 되겠죠."

그는 달변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도중에는 단 일초의 침묵도 '사치'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비난에는?

-'소르망은 언론에 너무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사이비 지식인, 언론의 단골손님이다'라는 비판도 있던데….

"그래요? 글쎄…(잠시 침묵). 언론의 단골손님이라는 주장에 'yes'와 'no'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전 연구나 저술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영향이나 방해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시즌에 따라 활동하는 록스타와 같다고나 할까요(웃음). 다만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대중과 지식인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필요성을 느끼고, 그래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인터뷰는 약속시간을 훨씬 넘긴 밤 9시가 돼서야 끝났다. 그는 2일 파리로 돌아갔다.

<김정안기자>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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