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독일 10주년]독일인 3人의 달라진 삶

  • 입력 2000년 10월 4일 18시 54분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10년 전 통일의 날. 동서독 주민은 그렇게 외치며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독일사회는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실험장으로 변했다.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 시장경제의 도입, 동독체제의 해체 등 대변혁의 터널을 거친 뒤 독일사회는 이제 하나 둘 정돈절차를 밟아가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보면 독일 통일은 많은 사람에게 기회와 몰락의 인생유전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 동독출신 택시기자 얀케 ▼

①베를린의 택시 운전사 클라우스 얀케(63). 정년이 2년밖에 안 남았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운전대만 잡으면 콧노래가 나온다. 동프로이센의 땅이었던 폴란드 슐레지엔에서 태어난 그는 2차 대전이 끝나자 선대의 고향인 동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안 해본 게 없다. 17년간 푸줏간에서 일한 뒤 68년부터 택시를 몰았다.”

그는 이제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베를린의 고층 빌딩 숲을 누빌 때마다 신이 난다.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크다고 할 수 없는 20평 규모의 임대조합주택에 살지만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부자로 만든다.

“동독시절에는 8000마르크나 하는 컬러TV를 사기 위해 꼬박 1년을 저축했다. 그러고도 1년을 더 기다려야 TV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행복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들 토르스텐(33) 때문이다. 동독시절 공장에 다니던 아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통일과 함께 자동차정비소를 차리면서 쏠쏠하게 돈을 번다. 이제 가족들도 여름휴가를 꿈에 그리던 스페인으로 갈 수 있다. 아무 희망도 없던 얀케씨의 가족에게 통일은 다시없는 기회로 작용했다.

▼ 前 동독공장직원 비츠 ▼

②드레스덴의 시장통에서 만난 게랄드 비츠(65)와 크리스테네(60) 부부의 고단한 삶은 통일 이후에도 전혀 변한 게 없다.

동독시절 화학공장의 비서였던 크리스테네씨는 동유럽 경제의 붕괴로 85년 회사가 문을 닫자 실업자가 됐다. 공구공장에 다니던 남편 게랄드씨는 이듬해 당뇨와 다리마비 증세가 오면서 휠체어를 타는 2급 장애인이 됐다. 89년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 마티아(33)도 과로로 쓰러져 아직도 방문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정부의 주선으로 크리스티네씨는 재교육을 받아 현재 드레스덴 시청의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높아지는 물가때문에 남편의 연금과 자신의 월급으로는 약값과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생계비를 감당할 수 없다.

동독시절 35평의 집에 월세 50마르크를 내고 살았지만 지금은 20평에 800마르크를 내야 한다.

“통일이 되면 늙은 우리는 별볼일 없다 하더라도 딸은 새 세상을 볼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희망은 빗나갔다. 집세만이라도 내렸으면 더 소원이 없겠다.”

▼ 前 서독대령 탐 ▼

③라이프치히의 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클라우스 탐(59). “통일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지만 특히 나에게는 특별한 인생유전을 경험하게 한 계기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서독 대령으로 라이프치히에 파견된 그의 임무는 작센주에 있는 동독군 장비를 해체하고 동독군인의 성향을 조사해 해고하는 일이었다. 그가 임무를 마치자 서독군 49만명과 동독군 9만명이 37만명으로 감축됐다. 장성 진급을 바라보고 있던 그 역시 구조조정의 대상이 돼 전역하게 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그는 퇴임 후 라이프치히에 정착해 연금과 실업수당으로 생활하다 지난해부터 일본과의 무역업을 시작했다. 부인 레나테(53)는 “통일은 우리의 삶을 한순간에 변화시켰지만 아직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베를린 자유大 페니히 교수 ○

“통일은 미래에 대한 투자다. 한국은 엄청난 분단비용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통일비용인 북한지원을 왜 주저하는지 모르겠다.”

독일에서 몇 안되는 한반도 전문가인 베르너 폰 페니히 베를린자유대 교수(56)는 2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측에 너무 많은 것을 지원하고 있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 이같이 주장했다.

―독일통일 10년을 평가해달라.

“총론적으로 독일인 대부분은 통일에 긍정적이지만 각론에서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선택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동서독이 정치적으로 통일은 됐지만 경제적 통합은 아직 멀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수십 년 떨어져 살다가 불과 10년 만에 동질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통일 이후 동독주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감정의 골을 메우고 진정한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2∼3세대의 기간이 필요하다.”

―지역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통일로 인해 동서독 주민 모두가 이익을 보고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 마음의 장벽이 너무 높다. 예를 들어 서독주민은 자신이 부담하는 통일세때문에, 동독주민은 실업문제때문에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해결방안이 있는가.

“베를린에서는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해도 5단계의 임금을 받는다. 적은 봉급을 받는 동독주민의 심리적인 갈등과 소외감은 엄청나다. 그러나 상황은 매년 나아지고 있다. 하루빨리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고 소득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극우파의 폭력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독일만의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에도 극우파는 존재한다.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실업자가 되면서 폭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이들은 사회적 관심을 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외국인 공격이라고 믿고 있다. 특별히 외국인에 대해서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동독지역만의 현상도 아니다.”

페니히 교수는 한반도가 통일된다 하더라도 북한주민이 가진 정체성을 남측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통일은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지원은 통일 후의 통일비용에 대한 선투자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통일시위 주도 퓨러 목사 ○

“독일통일의 날은 10월3일이 아니라 10월9일로 변경해야 한다. 바로 이날 동독 민주화운동과 베를린장벽 붕괴에 결정적인 기폭제가 된 라이프치히 촛불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독 독재정권에 저항해 1989년 라이프치히 촛불시위를 주도한 크리스티안 퓨러 목사(57)는 3일 통독 1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시각 베를린 교외에서 기자와 만나 “10월9일은 ‘독일 민족의 날’로 명명돼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통일 10주년의 감회가 남다를 텐데….

“지난 10년 동안 독일사회는 높은 실업률과 동서독간 불화, 배금주의 등으로 너무 찌들었다. 이제 우리를 다시 발견할 때가 됐다.”

―라이프치히 촛불시위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81년부터 ‘월요기도회’를 갖고 서독에 공격용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에 반대해 생명구제운동을 벌였다. 그 후 이 모임은 민주화와 해외여행을 열망하는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촛불시위는 혁명의 전통이 없는 독일에서 평화적 시위를 통해 오늘의 독일을 가능케 한 일대 사건이다.”

―통일된 후 개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가.

“동독시절 민주화를 위해 기도했다면 지금은 실업난 해소와 신나치운동에 물든 청소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당시 동독 민주화운동을 했던 지도자들이 정치세력화되지 못했는데….

“그렇지 않다. 직접 정치에 뛰어든 사람은 드물지만 목사의 딸로 현 기민당(CDU) 총재인 안겔라 메르켈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이 우리를 대신해 동독주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과 동독주민에게 교회가 정신적인 피난처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다.”

<베를린〓백경학기자> stern10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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