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3시간 남짓 차를 달리면 황량한 사막은 이내 푸른 들판으로 바뀌고 지중해 연안의 이집트 제2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이른다.
지중해 기후대에 속하고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땅을 끼고 있어 이집트 밀밭의 60%가 이 일대에 있다. 포도 귤 사과 등을 재배하는 농장도 많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최후를 장식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즐겨 마신 포도주도 여기서 만들어졌다. 》
알렉산더대왕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이 도시에는 직경 9m의 거대한 ‘폼페이의 기둥’과 로마시대 지하묘지인 카타콤브, 원형극장 등 유적으로 가득하다. 연중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의 관광객으로 붐빈다. 연간 외화의 37.7%를 관광에서 벌어들이는 나라인만큼 이슬람 율법에서 금하는 술이지만 관광객용으로 직접 만들어 팔고 있다. 호텔 식당 등에서 세 종류의 맥주를 팔고 있었다.
유럽풍 건물이 많은 도심을 질러 쪽빛 지중해에 이르면 ‘카이트 베이 요새’가 나온다. 로마 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린 높이 120m의 파로스등대가 있던 자리에 이슬람 술탄이 15세기에 세운 군사기지다. 병사들이 서 있던 망루 위는 전통 이슬람 복장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지중해의 살랑대는 미풍을 맞으며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 차지였다. 유럽의 휴양지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닷컴기업-PC방 쉽게 발견▼
카이로 시내로 돌아오는 길 휴게소에 차를 세우자마자 청년이 다가와 차를 닦는다. 이집트 돈으로 2파운드(약 700원). 기계세차시 비용 5파운드(약 3500원)의 절반 이하다. 사람 품삯이 기계 사용료보다 싼 노동집약적 후진 사회인 것이다. 카이로 시내 곳곳에는 내쇼널 파나소닉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은행 등 세계적인 기업과 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 LG전자 한국타이어 삼성전자 현대건설 등 한국기업 광고판이 넘치고 닷컴기업과 PC방도 자주 눈에 띈다.
이집트는 공기업 민영화를 활발히 진행하며 세계화의 길목에 접어들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카이로무역관 김주남(金周南)관장은 “315개 공기업 중 137개가 민영화됐지만 회계자료 부실과 해고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문화가 개방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입찰 준비차 카이로에 온 한국 H중공업의 한 간부는 “입찰일도 모른 채 갈 때마다 새로운 서류를 요구하면서 하는 ‘내일 또 오라’는 소리만 며칠째 듣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통 이슬람 문화와 사회주의 정치이념, 자본주의 경제정책이 조화를 이루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던 날은 마침 이슬람의 휴일인 금요일이었다. 낮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모스크의 확성기를 통해 들리자 로마원형극장 관리인은 유적지내 잔디밭에 담요를 깔고 홀로 메카를 향해 예배를 올렸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신작 할리우드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간판이 걸린 영화관 건너편에서 예배하는 모습은 이채로웠다. 유럽문명의 역사적 영향이 크고 개방물결이 거세도 ‘머리는 이슬람’에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왕국의 수도였던 멤피스와 사카라는 리비아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찾아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모래 바람 보다 매연이 견딜만한 것일까. 인구 1700만명의 거대 도시 카이로를 굽어보는 언덕에 십자군전쟁때 건설된 방어기지, 시타델에서는 모스크 첨탑 사이로 언뜻언뜻 교회 십자가 표시도 눈에 들어온다. 초기 기독교인 콥트교 교회다.
카이로 구시가의 한 콥트교회 미사를 지켜보았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 예배를 드렸던 장소에 만든 교회라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라쿠스’로 불리는 트라이앵글 반주에 맞춰 성가를 부르며 성찬예배를 보고 있었다. 천주교회 풍경과 흡사했다. 교회 내부가 유대교풍 장식과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혼재된 모습을 보며 이집트의 종교적 다원성과 함께 유연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신교 종교문화 속에서 고대 문명을 꽃 피웠던 이집트인에게는 어차피 기독교나 이슬람교 모두 ‘정복자의 종교’라 따지고 가릴 이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카이로 시내의 이슬람박물관에는 1600년대 인체 해부도, 지구의 등이 진열되어 있어 중세 이슬람 세계의 과학적 지식이 대단했음을 보여주었다. 여느 박물관과 달리 인물 조상(彫像) 등이 하나도 없었는데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 교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의 우상이라면 영화배우 정도일까.
▼연간 영화 120여편 제작돼▼
이집트는 아랍국가 가운데 최대의 영화대국이다. 1990년대 연간 평균 120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로 연애스토리와 코미디다. 최근 인기를 모으는 영화는 ‘아세파’. 무대는 걸프전쟁. 이라크에 일하러 갔다 군지원인력으로 쿠웨이트 침공작전에 참여하게 된 형과 다국적군에 가담한 동생 이야기였다.
저녁시간 카이로의 한 가정집 TV 앞에 앉은 아이들은 일본 만화영화 포케몬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위성방송과 인터넷으로 국경과 문화권 구분이 희박해진 세상, 저들은 어쩌면 ‘문명의 충돌’ 대신 ‘문명의 화해’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hanscho@donga.com
▼[인터뷰]모하메드 살레 카이로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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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고고학박물관에는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 대왕의 승전 기록판, 투탕카멘왕의 황금 마스크 등 고대문명의 정수가 모여 있다.
모하메드 살레 박물관장은 “고대 문명은 역사의 뿌리인만큼 이슬람국가 이집트와도 당연히 연관이 있다”고 강조했다. 탈레반 집단이 우상이라며 불상을 파괴하는 것과 달리 이집트는 고대 유적 발굴 작업을 지금도 계속중이다. 관광자원 측면도 강하다.
그는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 기독교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면서 이교도의 존재를 인정하는 코란의 보편주의를 강조했다. ‘이교도’ 관광객이 많아지면 이슬람 가치관이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는 잘못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집트는 끊임없는 외침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고 약탈당했다.
“모두 얼마나 되는지 대통령도 모를 겁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이집트 유물의 90% 가량은 비합법적으로 반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국주의의 광풍이 지난 지금, 반환하는 게 역사의 순리가 아닌가.
“시나이 점령시 가져간 문화재 일부를 이스라엘이 반환한 정도입니다. 국제법상 약탈 문화재 반환에 관한 규정이 없습니다. 또 어떤 나라도 반환할 의사가 없습니다. 하긴 영국의 대영박물관도 약탈 문화재를 반납하고나면 유지가 안될 겁니다.”
1850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 파샤가 유물 파괴와 노략질을 보다못해 만든 박물관이 카이로박물관의 전신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직도 곳곳에서 4000, 5000년 전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여유’ 때문일까,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취재후기-매연과 쓰레기에 갇힌 찬란한 문명의 후예들▼
카이로 일대 총 2000㎞를 일주일간 취재하는 동안 무사히 차를 운전해준 아쉴라프 아흐메드 아브딘(38)에게 감사한다. 신호등 없는 네거리, 보도 없는 도로, 나귀가 끄는 수레와 낙타로 혼잡한 길을 다니며 아찔했던 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 밤에는 더욱 겁이 났지만 교통사고는 한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금주 율법 덕분에 음주운전이 전무한 탓일까.
한 호텔 지하 서점에서 바가지를 씌우려 한 주인도 생각난다. 다른 곳보다 배나 비싸다고 하자 분명 같은 책인데도 “그건 복사판이다. 따지려면 거기 가서 사라”고 목청을 높였다. 박물관 공항 등지의 공중화장실 문지기도 이색적이었다. 문을 열어주고 비누와 종이수건을 건네주는 친절을 베풀다 나중에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푼돈을 요구했다.
골목길에 잠깐 차를 세웠다가 출발하면 어디선가 아이가 나타나 주차비를 달라고 했다. 고속도로 가로등 가운데에는 기울어진 것이 많았다. 카이로 외곽의 작은 마을은 상하수도 시설이나 쓰레기 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물차 경연대회장 같은 카이로 도심은 항상 매연으로 덮여 있었다. 카이로 일대의 관개용 수로는 쓰레기로 메워져 가고 있었다.
과연 이곳이 4000, 5000년 전 인류의 대부분이 수렵을 하며 움막에 살 때 그토록 정교하고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던 이들의 후예가 사는 곳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농사일에 지쳐 밭둑에 그냥 쓰러져 잠든 농부들과 나귀를 타고 짐수레를 모는 대여섯살 됨직한 소녀의 모습을 보면 5000년 전 풍경이 그려졌다. 일 년을 12개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 과학지식을 가졌던 이들의 후손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찬란한 고대문명을 낳은 지식정보가 사라져버리고 진보 대신 퇴보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결국 ‘정보를 쥔 소수의 독점욕’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