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부스 국왕은 지난해 11월18일로 즉위 30주년을 맞았으며 영국 사관학교 출신이다. 오만 근대화를 가져온 통치자로 신망받고 있었다. 오만 주재 대사관 박신웅 대사는 “각종 행사 때 보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왕 앞에서 주무 장관들이 거칠 것 없이 연설하는 것이 인상적”이라면서 “온건하고 사심 없이 민생을 챙기는 국왕”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한달간 카부스 국왕은 북서부 샤르키아 지역에서 한달간 주민과 함께 지내며 숙원을 들어주는 연례 행사를 가졌다. 언론매체는 연일 국왕과 촌로의 만남을 소개하는데 나이 지긋한 각료들이 장총을 손에 들고 배석한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무스카트에서 만난 한 운전사는 “국왕은 지프를 직접 몰고 이 행사에 나선다”며 “친구 한 명은 10여년 전 결혼 자금이 없어 쩔쩔매다 이 행사 때 국왕을 만나 호소해 바로 그 자리에서 소원을 푼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오만 타임스의 한 기자는 “국왕 즉위시 국내 포장도로 길이는 총 10㎞, 병원은 고작 2개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전국토를 잇는 포장도로와 550여개 병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민 무료진료가 원칙이다. 12년 의무교육도 보장돼 있으나 체계가 잡힌 지 오래지 않아 문맹률은 59%로 높다.
카부스 재임 30년은 루살 소하르 라이수트 니즈와 등지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끊임없이 들어선 ‘건설의 역사’다. 대부분의 산업단지 발전소 은행 등은 국왕과 정부가 자본을 투자하고 건설을 주도한 국영업체다. 지난해부터 민영화에 대한 보도가 언론매체에 큼직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들 국영업체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국가 정책목표로 민영화 방침이 결정됐기 때문. 오만 주재 대사관에 근무하다 최근 귀국한 김문환 서기관은 “공기업 체제는 경쟁시대에 맞지 않고 운용의 탄력성이 없으며 부패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은행 전력회사 등이 급속도로 민영화되고 있으며 지금은 오만 최대의 통신회사인 오만텔(OTC)과 시브공항 민영화가 추진 중이다. 오만 타임스의 기자는 “오만 상업은행(CBO)과 뱅크무스카트(BM)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합병했으며 해외지점 영업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산 시스템을 혁신 중”이라고 소개했다.
민영화와 함께 외국 민간자본 유치도 활발하다. 지난해 10월 가동에 들어간 오만 액화가스공장의 경우 로열더치셸이 지분의 30%를, 오만 민간기업이 19%를 소유하고 있으며 운영은 민간이 맡아서 하고 있다. 내년에 가동할 살라라 인근의 발전소는 정부가 자금 일부만 지원했을 뿐 민간이 건설과 운영을 맡는다. 미국의 US 펌 글로벌사와 프랑스 BNP 파리바 은행이 투자했다.
오만이 지키고 있는 외교정책은 개방된 서방 자본주의국가와 이슬람 전통이 강력한 아랍권 국가의 사이에서 중도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심각해지자 상황은 다소 달라졌다. 무스카트의 알 인쉬라 거리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술탄 카부스대학에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20일 열린 카부스 국왕 즉위 30주년 기념행사장에는 윌리엄 코언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미 해군 밴드가 축하연주를 하며 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객석에서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야유가 터져나왔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정부는 민심을 반영하듯 곧 무스카트 주재 이스라엘 무역대표부를 폐쇄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주류를 이루는 다른 아랍국가들는 달리 오만의 이슬람 종파는 ‘이바디’파다. 국립 술탄 카부스대학 내에도 모스크가 있었지만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입장할 수 없었다. 이바디파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숨진 후 혈통을 이어받지 않아도 이슬람교 최고지도자의 교권을 승계할 수 있다는 이들이 만든 종파로 극단적인 이슬람교 원리주의자들과 달리 온건하고 실용적인 종파. 무스카트에서는 힌두교 사원 옆에 기독교 교회가 자리잡은 곳도 눈에 띄었다.
술탄 카부스대학에서 만난 남학생에게 “여학생들과 자주 데이트를 하느냐”고 묻자 손을 내저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남녀간의 만남은 대부분 친지 소개로 이뤄진다는 설명이다.
종교적 기강을 중시하는 오만의 분위기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공보처 관리인 아델 무하마드는 “나라 어디에도 여자가 접대하는 업소가 없으며 호텔의 나이트클럽도 자정을 넘겨 영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바디’라는 말은 ‘순백(純白)’을 뜻한다. 이 종파의 영향 때문인지 오만의 집은 옆나라 아랍에미리트의 황색 집과 달리 대부분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옷도 새하얗다. 오만인들은 신앙심을 굳게 지키면서 국제경쟁력을 갖춘 경제 체제를 이루기 위해 매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종교차별 없어 인도 IT인력 유입 줄이어▼
오만 사회는 인도인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인구 232만명 중 50만명이 인도인이라 자연히 양국의 문화 경제 교류는 깊을 수밖에 없다.
오만 최대의 재벌인 바한그룹의 주력기업인 바한엔지니어링(BEC)의 슈레시 비르마니 사장(58)은 오만에서 가장 성공한 인도인으로 꼽힌다.
인도인은 대략 200년 전부터 서인도 구즈라트 지역에서 오만으로 건너왔다. 과거 오만에는 인도 화폐인 루피화가 통용되기도 했다. 현재 오만 화폐 리알의 하위단위인 ‘바이자’란 말도 인도 화폐 ‘파이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는 “오만과 인도인은 모두 문화적 자긍심이 높다”며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이 오만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특별히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만에서 활동한 인도인 가운데 이름난 사람으로는 그 말고도 건축가 A C 무커지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오만 왕궁 등을 지어 국왕의 큰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비르마니 사장은 1977년 기술인력을 찾기 위해 인도를 방문한 수하일 바한 바한그룹 회장의 눈에 띈 것이 계기가 돼 오만에 건너왔다. 액화천연가스 관련 시설과 소하르 병원 건설을 맡아 전공 분야인 전기공학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후 바한그룹은 전자 자동차판매 등의 분야를 망라한 오만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현재도 정보기술을 갖춘 젊은 인도의 기술자들이 오만으로 줄지어 찾아오고 있다.
“오만은 이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한그룹에서 은퇴한 뒤에도 오만 정부가 거주허가를 내준다면 계속 머물고 싶습니다.” 그는 해안지역을 끼고 있는 까닭에 일찍부터 ‘열린 문화’의 전통을 갖고 있는 오만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홍이점' 여성의원 라힐라▼
지난해 9월 국가하원자문회의(Al Shura·의회격) 총선에서 수도 무스카트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라힐라 아메르 술탄 알 리야미의원(53)은 의원 83명 가운데 2명뿐인 여성 중 한 사람이다.
국가하원자문회의는 지역별 선거인단이 투표하는 간접선거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여성이 당선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오만에 제대로 된 대학이 없던 시절 이집트 영국 등지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그는 귀국 후 교육부 관리로 청력 시력 등을 상실한 지체장애아를 위한 교육분야에서 일해왔다.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1974년경만 해도 오만에는 농아와 정신지체아를 위한 학급이 1개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학교가 각각 1개씩 세워졌다. 26년간 오만 여성협의회(OWA)에서 활동해왔으며 현재는 민간기구인 여성사회활동 조정위원회(CCWVW) 위원장을 맡고 있다.
라힐라 의원은 “여성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싶었으며 활동영역을 넓히고 싶었다”고 정계진출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현재 왕실도 여성이 적극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 5명이 왕실이 지명하는 국가상원자문회의 의원으로, 3명이 차관, 1명이 대사(폴란드 주재)로 일하는 등 여성 공직 진출이 최근 들어 활발해졌다.
그는 현재 젊은 여성의 인기 직종은 교사 간호사 등이며 주식중개인 엔지니어 군인 경찰 등 여러 분야로 진출이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슬람 세계 여성이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채 집안 일만 한다는 생각은 이제 옳지 않다는 것.
그는 “코란에도 ‘신은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따지기 보다 사람의 행동을 통해 영혼을 평가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덧붙였다.
국가 하원자문회의 의원직은 일생동안 두 번만 할 수 있다. 그는 “의원직을 그만 두더라도 사회활동을 계속 하며 ‘움직이는 여성’의 본보기가 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