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질렛당은 터키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의석을 가진 제1 야당인 데다 더구나 이슬람을 대표하는 정당이다. 그런 정당이 국민 99%가 이슬람 신자인 터키에서 세속주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은 이방인에겐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터키의 현실이었다.》
터키에서 이슬람계 정당이 강제로 간판을 내린 것은 이번이 4번째. 파질렛당의 전신인 레파당(복지당)은 1996년 6월 총선을 통해 집권까지 했으나 정치에 이슬람 요소를 도입하려 했다는 이유로 1년만에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98년 역시 헌재 판결로 문을 닫고 말았다.
집권 정부까지 물러나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바로 군부였다. 군부는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레파당 정부를 쫓아냈고 또 올 2월엔 "파질렛당이 국익을 해친다" 며 수도 앙카라 서쪽 신잔지역에서 탱크를 앞세운 채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앙카라 중동공과대학의 아이쉐 규네쉬 아야타 정치행정학과장은 "군부는 엘리트 장교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사상교육과 정부에 대한 영향력 행사 등을 통해 국시(國是)인 세속주의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고 설명했다.
터키 군의 수장인 총참모장은 정부 내 서열 4위로 국방장관보다 지위가 높다. 또 총참모장과 육해공군 사령관은 국가안보위원회에 대통령 총리 내무장관 외무장관 등과 함께 참석해 국방 및 세속주의와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터키는 세속주의를 통해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연합(EU)에 들어가 떳떳이 유럽의 일원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으로 걸림돌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올 2월 19일 뷸렌트 에제빗 총리는 이색적인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통령이 회의에서 나를 모욕했다. 국가적 위기다" 는 게 회견의 주요 내용. 회의석상에서 경제개혁의 해법을 놓고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다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기자회견을 가진 것이다. 지도자간의 알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쿠데타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이날 하루에만 76억달러가 은행에서 빠져나가면서 은행 대출이자율이 최고 5000%까지 치솟았다.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다.
대통령제가 가미된 의원내각제인 터키 정부는 3당 연립 형태로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하다. 현 정권은 23년 공화국 수립 이후 57번째로 정권의 평균 수명은 16개월에 불과하다.
터키에선 커피나 캔음료 등을 파는 자판기를 찾아볼 수 없다. 물가 변동이 하도 심해 제 때 요금체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물가는 80년대 초 정부가 인프라 구축을 위해 화폐를 과다하게 찍어내는 바람에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84년부터 99년까지 매년 거의 100%씩 올랐다.
심한 인플레로 화폐 가치가 떨어져 가격 단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호텔에서 파는 샌드위치 하나가 400만터키리라를 넘을 정도. 최고액권 화폐가 1000만터키리라 짜리다.
환율도 엄청나다. 환전소에 들러 200달러를 주자 무려 2억5000만터키리라를 내줬다. 터키 정부는 2월의 금융위기 직후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고정환율제 대신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 그러자 당시 1달러에 68만터키리라이던 환율이 지금은 125만터키리라까지 치솟았다.
이스탄불대학 경영정치학과의 유수프 투라 교수는 "터키 경제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맞은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정부의 과도한 재정 적자 때문" 이라며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에 있다" 고 진단했다.
물가가 심하게 오르고 환율이 요동치자 터키 국민은 가급적 터키리라 대신 달러를 갖고 있으려고 애쓴다. 은행원인 오스만 데미르바쉬(32)는 "인플레 때문에 모아 놓은 달러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 작정" 이라고 말했다.
사실 터키의 경제 위기는 60년대부터 시작됐다. 터키는 61년부터 올 5월까지 모두 18차례나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터키 상공인연합회의 아흐멧 헬와즈 사무국장은 "터키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은 부패한 일부 정부 관리와 정치인, 금융인, 국영기업인 등이 결탁해 빚어낸 합작품" 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터키 경제의 앞날을 낙관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옥영재 이스탄불 무역관장은 "터키의 인적자원과 교육수준, 유럽 아시아 중동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잇점,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결속력, 역사적 배경 등을 감안할 때 터키의 경제적 잠재력은 무한하다" 고 말했다.
▼야카야 관장이 말하는 '명물'아야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 구시가지에 자리한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여러 문화가 결합된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비잔틴제국 시대인 537년 세워져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다 오스만터키가 이스탄불을 정복한 1453년 이후 1934년까지는 이슬람 사원으로 쓰였으며 이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무스타파 야카야(55) 박물관장을 만나 박물관의 이모저모에 대해 들어보았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특징은 뭔가.
"터키의 문화는 여러 역사적인 문화들이 결합된 '모자이크 문화' 라 할 수 있다. 문화는 국제적인 것이지 국지적인 것이 아니다. 상호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바로 이런 모자이크 문화의 대표적인 건물이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모자이크 건축물이라 할 수 있나.
"기둥 대리석 장식 등은 그리스 이집트 중동 등 여러 시대, 여러 지역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만들어졌다. 교회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을 때도 예수의 그림 등이 많이 있었지만 횟칠로 가려두었을 뿐 훼손시키진 않았다. 지금은 이를 모두 복원했다. 또 외부에 첨탑 4개를 세우고 내부 구조를 약간 바꾸었을 뿐 건물 자체를 손상시키진 않았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한국과 터키와는 역사적으로 다소 동질성이 있다고 본다. 독일에 있을 때 한국 친구를 사귄 적이 있어 한국을 좀 안다. 학생이나 연구원을 박물관에 보내면 도와주겠다."
▼메흐멧 누리 율마즈 종교청장▼
"전 세계에 46개 이슬람 국가가 있지만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구분하는 세속주의를 택한 나라는 터키 밖에 없습니다."
터키의 이슬람에 관한 모든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메흐멧 누리 율마즈 종교청장의 설명이다. "그는 그러나 세속주의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알라(신)를 믿는다거나 신앙과 관련된 기본적인 것들은 바뀌지 않을 것" 이라고 강조했다.
-왜 세속주의를 선택했는가.
"종교는 세상과 섞이지 않아야 하고 세상은 또 종교와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신론이나 무종교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종교적 삶을 영위할 자유를 누린다."
-문명간의 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모든 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세계는 점차 가까워지고 또 작아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문화가 다른 문화에 흡수돼 녹아버려서는 안된다. 서로 대화를 하고 영향을 주고받되 주체성을 잃어버려서는 곤란하다. "
-현대를 문명간, 종교간의 충돌과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종교의 근본은 하나다. 내세를 믿고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종교간의 갈등은 종교를 잘못 인식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같은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라도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종교와 교류하고 있다."
율마즈 청장은 작년 여름 바티칸의 교황청을 방문해 부교황과 서로 지속적으로 회의를 갖고 전문가를 교류하기로 합의한 것도 이같은 대화의 일환이라고 소개했다.
앙카라-이스탄불=이진녕기자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