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폴란드의 작은 농촌마을 예드바브네에서 열린 추도 행사는 이 같은 서양 격언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줬다.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7월10일 이 마을에서는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학살당한 유대인 추도식이 열렸다.
1941년 7월10일 독일군 점령하의 이 마을에서는 유대계 폴란드인 1600명이 헛간에 감금된 뒤 산채로 불태워지는 참극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 공산정권은 이를 나치 독일의 만행이라고 주장했다.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예드바브네에는 나치 독일의 잔학성을 규탄하는 유대인 추도비도 세워졌다.
진실은 지난 해 유대계 폴란드인 출신 미국 역사학자 얀 토마시 그로스에 의해 밝혀졌다. 60년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 쓴 채 역사에 가려졌던 진실은 끔찍했다. 학살자는 나치 독일이 아니라 바로 한 동네에 살던 폴란드인들이었던 것.
그로스씨는 저서 ‘이웃들(The Neighbors)’에서 독일군의 묵인 하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 불을 지른 사람들은 폴란드인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했다. 폴란드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폴란드 지식인들은 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오늘 한 인간으로서, 폴란드의 시민으로서, 폴란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끔찍한 범죄 때문에 양심에 충격을 받은 폴란드 국민의 이름으로 희생자의 영혼과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가랑비 속에 이어진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의 연설은 희생자 유족과 폴란드 국민, 더 나아가 유럽인의 가슴 속에 깊게 울려 퍼졌다.
비단 폴란드뿐만이 아니다. 21세기 첫해를 맞아 유럽에서는 지난 세기의 잘못에 대한 사과와 참회가 이어졌다.
유럽연합(EU)은 과거 아프리카 제국에 대한 식민통치를 사과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이 십자군 원정으로 그리스정교에 끼친 피해, 중국 선교과정에서 저지른 잘못과 오세아니아 토착 원주민 사회를 파괴한데 대해 참회했다. 교황의 참회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는 새로운 출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줬다.
폴란드 대통령이 유대인 유족들에게 머리를 숙이던 즈음 일본 정부는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우리의 수정 요구를 묵살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해묵은 얘기는 그만 접어두자. 정작 우리는 어떠했던가. 그리고 우리 언론은….진정한 사과는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다.
<파리〓박제균특파원>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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