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남자들이 불쌍해. 남자는 돈만 벌어다줄 뿐 집안의 경제권은 여자가 쥐고 있잖아. 부부가 맞벌이하는 미국에 비하면 한국은 여성상위 사회 아니냐”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혼자 애쓰고 있는 한국 친구들을 보면 맞벌이를 하는 나로서는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도 든다.
▼美기업 여성인력개발 매진▼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자의 행복〓전업주부’로 규정짓는 낡은 사고방식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진다. 여자에게도 일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고 나서 스스로 행복한 길을 선택하라고 해도 그런 등식이 성립할까.
그래도 요즘엔 한국에 갈 때마다 남녀관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며 깜짝깜짝 놀란다. 우선 학교 교육에서는 거의 남녀가 평등해진 것 같다. 최고학부인 대학에서도 남녀의 수가 거의 같아지고 여자 학생회장, 여자 응원단장도 나왔다고 하니 남자들로서는 위기감을 가질 만도 하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예 여학생이 학급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잘 키운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다. 바로 거기서 한국사회의 병목현상이 나타난다. 기업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육아휴직 등에 따른 기업부담이 크다며 여성 채용에 소극적이다. 또 소수 여성사원을 채용한다고 해도 여성이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요즘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활약이 눈부시다. 휴렛팩커드, e베이 등은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거대 기업을 이끌고 있으며 내가 다니는 IBM만 해도 사업부문별 여성 사장이 적지 않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만 봐도 여성 경영자들이 여느 남성 CEO 못지 않다.
한국 기업에서는 이런 여성 CEO는커녕 여성 임원, 여성 간부도 제대로 찾아보기 힘든 것은 왜일까. 미국 여성이 한국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인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고급인력을 양산해놓고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 한국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 기업들은 남녀는 물론 인종이나 동성연애 여부 등에 대해서도 기존의 차별을 시정하려고 애쓴다. 예를 들면 채용과정에서는 물론 매니저 승진결정 때도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능력을 가졌을 때는 여성을 선발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적인 특성이 현대 기업경영에 더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여성인력을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또 남성들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성이 소수이기 때문이다.
2년 전 부임한 일본만 해도 미국만큼은 안되지만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을 갖춰나가고 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육아시설이 크게 확대되고 여성의 재택 근무도 서서히 늘고 있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배제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회계사인 내 처는 나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데 엔지니어인 나보다 승진이 빨랐다. 한국에 있는 친지들은 모두 “어떻게 참고 사느냐”며 의아해하는 눈치지만 나는 내 처가 나보다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다. 내 처 밑에서 일하는 남자 부하직원들도 그녀를 믿고 따른다. 한국에서는 여자 상사와 남자 부하직원들이 제대로 일하며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례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국남성 가부장 사고 바꿔야▼
한국 남자들의 이중적인 사고방식을 하나만 지적하자. 대부분 자기 아내가 회사일 때문에 가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반대로 자기 직장의 여자동료는 집안일 때문에 회사 일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또 자기 딸은 훌륭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길 바라면서 자기 직장에서는 여자들에게 기회를 주려 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이 선진국과 같은 경쟁력을 갖추려면 이미 100% 활용되고 있는 남자들보다는 절반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 인력을 개발,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박노순 IBM 아시아태평양본부 시니어 매니저·일본 도쿄 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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