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포도주 산지를 방문하면서 만난 전문가들은 포도주의 부정문제는 프랑스보다 국제시장에서 더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면서 샤블리(Chablis)라는 백포도주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샤블리는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150㎞ 떨어진 작은 마을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의 공식명칭이다.
▼가짜제품 명예걸고 퇴치▼
문제의 발단은 미국과 호주 등지의 일부 포도주 대기업들이 생산한 백포도주에 샤블리라는 이름의 상표를 도용해 국내시장은 물론이고 수출까지 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여러 차례 만나 친분이 있는 샤블리 포도주 보호협회장인 장 베르나 마르시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을의 연간 포도주 생산량은 2000만ℓ인 반면 미국과 호주 등지에서 샤블리란 상표를 달고 판매되는 백포도주는 3억ℓ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샤블리라는 이름을 다른 나라에서 도용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지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리나’ 때문이란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러시아 상류사회가 상파뉴와 함께 샤블리 포도주를 애호하는 모습이 독자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미국 마케팅 전문가들의 영감을 자극한 것이다.
마르시브씨는 프랑스의 샤블리라는 마을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가 세계에서 유일한 샤블리이며 그 외에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프랑스판 신토불이가 샤블리의 무기인 셈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호주의 생산자들은 이 마을과 관계없이 샤블리라는 이름이 좋아서 상표로 사용하는 것 뿐이라며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논리에 따른다면 한국의 경기 이천도 이름이 좋으면 미국 캘리포니아 쌀에 이천표라는 상표를 내걸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이 논쟁에서 샤블리 농가의 신토불이 주장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법정에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 업체는 자진해서 일본 시장으로의 수출을 포기했고, 농민 대표들이 여러 나라 시장들을 다니며 가짜를 찾아내 공개하자 도덕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다.
프랑스 국내의 가짜 포도주 문제제기와 샤블리 농가의 주장의 근거는 프랑스가 1935년부터 시행해오고 있는 ‘원산지 통제 명칭제도(AOC)’로 이 제도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특정지역의 포도밭이 가진 고유한 토양과 기후의 자연환경적 특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각 지역마다 보유하고 있는 포도 재배와 포도주 담그는 기술의 노하우, 즉 인간적 요소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기초로 다양한 특성을 가진 포도주들을 생산지역별로 구분하고 각각에다 원산지 통제 명칭을 부여하게 되는데 현재 이 명칭의 종류는 400여개에 이른다.
그래서 포도주를 조금 아는 사람들은 원산지 명칭만 보고도 좋은 품질의 포도주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제도의 목적은 품질등급을 객관적으로 구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원래 목적은 포도주의 생산지역별 특성을 투명하게 해서 공정한 시장거래를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포도주의 품질향상과 시장개발, 그리고 생산농가들의 소득향상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제도의 시행결과는 성공적이다. 포도주 수출 세계 1위인 프랑스는 지난해 62억ℓ에 이르는 포도주 생산량 중 25%를 수출해 57억유로의 외화를 벌어들였고 이 중 AOC에 속하는 고급 포도주가 80%를 차지했다.
▼원산지 명칭제 엄격 운용▼
프랑스 포도주의 이런 성과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농업환경과 인간적 요소를 문화적 전통과 결집시킨 ‘신토불이’ 정신이 구호나 이념에만 머물지 않고 효율적인 시장경제질서에 실천적으로 접목한 데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자기 아름을 도용하는 가짜 포도주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샤블리 농민들의 신토불이 정신이 세계시장을 석권한 프랑스 포도주의 저력임을 느끼게 한다.
하석건 농수산물유통공사 프랑스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