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보니]이재덕/´요령´이 ´원칙´보다 앞서서야…

  • 입력 2002년 3월 19일 18시 08분


30년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를 여러 가지로 비교해 보게 된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친구 아들이 미국에서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크게 칭찬해준 일이 있다. 그는 대형 로펌에 들어가게 됐다. 겹경사인 셈이다. 그런데 로펌 첫 출근 날 저녁, 그는 환영회에서 술을 몇 잔 마시고 집으로 오다 동네에서 교통사고를 냈다.

이 사고로 면허정지 6개월에 벌금을 물게 된 그를 두고 우리는 “장래성있는 아이였는데…”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교통사고가 사고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일로 미국에서 공직생활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런 경우 매우 엄격한 것이 미국사회다.

▼멀고도 먼 신용사회의 길▼

언젠가는 한국에서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 운영하던 여행사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다. 마침 미국의 행정청에서 나와서 ‘건물의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며 과태료를 매길 태세였다. 미국 공무원은 “수리했다는 영수증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직 제출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러자 여행사 사장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교포 대학생을 나무랐다. 아무 영수증이나 제출하지 않고 뭘 했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요즘 젊은이들은 이게 안 돌아가요”하면서 머리 위로 손을 한바퀴 돌리는 것을 보고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가 젊은 후배에게 가르치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요즘도 한국에서 들리는 뉴스를 보면 유죄판결이 훈장과 동일시되고 정직이 ‘요령 부족’과 동의어로 쓰이는 게 아닌가 해서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많다.

미국에서도 별의 별 일들이 다 생기지만 신용사회라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그것은 의심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 상대방을 믿고 시작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이런 신용사회는 거저 키워진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믿음을 악용하는 질서의 파괴자에게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매섭게 죄값을 치르게 해왔던 것이다.

한국에서 요즘 부동산시장이 뜨겁다고 한다. 또 투기열풍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한국 부동산 시장을 생각하면 제도의 생명은 무엇인가를 새삼 되새겨보게 된다. 제도의 핵심인 법규는 간단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특히 세법의 과표산정과 세율에 관한 내용은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야 한다.

법규가 일반인에게 난해한 수준이라면 그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씌우려는 올가미에 불과하다. 세무사나 심지어 세무관리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내용이라면 부패 등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또 모든 제도나 법규는 근원치료를 위한 처방이 돼야 한다. 증상 치료에 그치면 안 된다.

단기 효과나 처벌만을 위한 법규로는 바람직한 처방이 못된다. 부동산 투기를 막는다고 온갖 처방을 다 내 놓아도 이를 근절하지 못하는 것은 병의 근원을 무시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의 근원을 알고도 의식적으로 피해가고 있거나 또는 나뭇가지만 잡고 흔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부동산 거래가 투명해지려면 먼저 부동산의 실명거래와 계약권의 전매 금지가 제도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부정 부패는 물론 탈세같은 반질서적인 범죄는 음성거래의 소지가 있는 사회에선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마치 습기가 있는 곳에 각종 곰팡이가 생기는 것처럼….

이런 제도가 확립된 후에도 이를 감시 감독하는 원칙은 바로 사람의 지성과 양심에 중심을 둬야 한다.

제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라 해도 운용이 바르지 못하면 실패한다. 이론적으로 완벽했던 공산주의가 몰락했던 것도 이 인간성을 무시했던 오류 때문이었다.

▼인성교육 강화해야▼

화려하기만 한 민주주의도 요즘처럼 금권정치 풍토가 만연하면 몰락의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법은 역시 교육이다. 몇 세대를 내다보는 인성교육만이 최선의 길이다. 외국 학제, 교사의 새로운 훈련방법, 선진 입학제도가 다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처럼 영향력이 큰 선생은 없다. 부모가 거듭나는 노력이라도 보여주면 그 다음 자손은 거듭날 확률이 더 높아지고 이렇게 몇 세대를 노력하는 동안 비로소 제대로 지성과 양심을 갖춘 세대가 대중을 구성할 수 있다. 그들이 뽑는 선량은 청문회에 공부도 안 하고 나왔다가는 망신당할 것이고 ‘몸싸움’을 했다가는 정계에서 영원히 매장되고 말 것이다.

이재덕 미국 뉴저지 팔리세이즈파크 코스모 부동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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