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9년 아래인 여학교 후배들의 모임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한국식 호프집에서 얼큰한 낙지볶음과 통닭, 흰 깍두기를 안주 삼아 마신 맥주에 불콰해진 우리들의 화제는 당시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에 시달리던 빌 클린턴 대통령 이야기로 번져갔다. 내가 “만일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성문제를 들추어내면 성할 사람 있을까”라고 물었더니 예닐곱 명이나 되던 후배들은 눈을 크게 뜨고 합창으로 “언니, 그 문제라면 우리 남편들도 한 사람 살아남지 못해요” 하는 바람에 모두들 킬킬대고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 뒤엔 한국의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어 씁쓸했다.
디지털 TV를 신청하면 하루종일 한국방송을 틀어주는 채널이 내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에 2개나 있다. 한국의 밤 9시 TV 뉴스를 이곳에서도 한국과 같은 시간대에 본다. 며칠 전 대통령 후보들의 TV 토론도 아주 열심히 보았다. 누가 우리나라의 다음 대통령이 될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그래서 서울 친구들에게 전화할 때마다 물어보지만 모두들 “감이 안 잡힌다”는 불투명한 대답뿐이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도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서로 묻는다. 젊은이들은 속사포처럼 “정의감 있는 대통령이요”라고 대답한다. 중년 이후 세대들은 “정직한 대통령”이라며 “어떻게 대통령 한번 하고 나면 돈이 수천억원은 다반사고, 몇 조원이라는 말까지 나옵니까”라고 자탄한다.
그래도 희망을 느낀 것은 월드컵 때였다. 세상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아니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쳤고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다. 우리나라 5000년 역사에 온 겨레가 하나 되어 함께 환희에 전율하던 일이 언제 있었던가.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질서있게, 문화인답게, 온 마음으로 정정당당하게 힘을 모으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때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까지 국민들과 하나되어 뛴 선수들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까.
사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새삼 잠바 입고 시장에 나가 상인들과 악수한다고 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마에 주름살이 많다고 성형수술해서 한 개만 남겨 놓았다고 갑자기 인상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정의를 사랑하고 올곧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나 행동거지에서 고매한 인품과 따뜻한 인간미가 절로 배어 나올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바라는 대통령은 그렇게 올바른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용기와 끈기로 성실하게, 굳은 소신을 가지고 국정을 펴나갈 의지의 한국인이다. 한국에 살든 외국에 살든 똑같은 심정이 아닐까. 그런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마친 뒤, 국민들과 함께 보람의 술잔을 들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영주 재미 수필가·한국수필가협회 뉴욕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