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집으로 신청서와 안내서가 배달됐다. 신청서는 3쪽이고 안내서는 12쪽이다. 뉴질랜드의 헌법, 법원의 구조로부터 고등법원 판사 임용 절차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그 임용 절차를 요약하자면 신청서를 낸 변호사들 가운데 누가 가장 능력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인지 추천과 심사를 바탕으로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이 상의한 뒤 내각에 임명안을 상정하면 내각의 결의를 거쳐 총독이 임명한다는 것이다.
뉴질랜드에는 다양한 법원이 있다.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은 물론이고, 가정법원 환경법원에다 토착민의 토지소유권 제청을 심리하는 마오리 토지법원 등. 이런 법원들의 판사를 임용하는 절차는 한국과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는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매년 일정한 수를 뽑는데, 여기서는 공석이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이처럼 공개모집을 해서 한 명씩 뽑는 것이다.
다른 것은 또 있다. 이곳 판사는 진급도 없고, 전출도 없다. 한번 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면 은퇴할 때까지 그 지방법원의 판사로 있다가 그만두는 것이다. 고등법원 판사 자리가 빈다고 지방법원 판사들 가운데 승진시키는 것이 아니고 위에 설명한 절차에 따라 새로 뽑는다. 또 일단 판사로 임용되면 은퇴할 때까지 판사로 머문다. 판사를 하다가 옷 벗고 변호사로 나오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는가? 자격은 7년 이상 변호사 생활을 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 임용되는 사람은 15년, 20년 이상 경력의 중량급 변호사들이다. 이렇게 임용되는 사람들을 보면 이미 법조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인 데다 다른 변호사들보다 경륜도 많고 실무에도 밝다 보니 뉴질랜드 법정에서 판사들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소송당사자들뿐 아니라 변호인들도 깍듯이 대한다.
엊그제까지 고등법원 판사를 하다가 옷을 벗고 나와 지방법원 사건을 수임해 변론하는 변호사 앞에서 재판을 주재하는,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새파란 판사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권위가 서지 않는다.
판사가 되기 전에 이미 충분한 재산을 모았고 한번 판사가 되면 진급도 없고 노른자위 자리로 전출할 일도 없되 은퇴할 때까지 자리가 보장되는 뉴질랜드의 판사들이다 보니 재판할 때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편을 들 일이 없다. 전관예우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다. 판사 하다가 나와서 변호사 업무를 하는 ‘전관’이 없으니 ‘예우’할 일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법개혁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데, 이렇게 전관예우 없는 뉴질랜드의 사법제도도 한번쯤 살펴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권태욱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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