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거대한 관료조직을 장악하지도 못했고 숱한 개혁과제들을 과감히 밀어붙이지도 못했다. 양심적이고 청렴한 것으로 믿어졌던 그는 임기 중반부터 갖은 부패스캔들에 연루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의 재선은 무난한 것처럼 보였다.
야코블레프 부시장으로선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정치적 배신자’라는 힐난이 쏟아진다고 해도 진정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해서라면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출마를 결심했고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됐다. 그의 출현은 한 시대의 종언이자 새 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도 모스크바와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어온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 제2의 도시라 부르지 말라. 북쪽의 수도(首都)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다. 그러나 이런 자존심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새로이 되살아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91년만 해도 소련 붕괴와 함께 밀어닥친 시장개혁의 격변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년간 도시 전체가 내리 몰락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러시아 전체가 겪은 일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국영기업이 파산 상태에 빠지고 실업자가 쏟아졌으며 공무원 등 공공부문 종사자들은 몇 달씩 월급이 밀렸다. 중앙정부의 보조금이 줄어들면서 시 예산이 모자라 도시 기반 시설에 대한 신규 투자는커녕 기존의 낡은 도로와 건물을 수리할 여력조차 없어 중심가인 네프스키대로 곳곳에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팬 도로와 곧 무너져 내릴 듯한 낡은 먼지가 날리는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됐다.
독일과 핀란드 등 서방과 가까워 개방을 상징하는 도시로 옛 소련 시절에도 자유롭고 활기에 넘쳤던 분위기도 급변했다.
이 지역 출신 현역 하원의원이 집 앞에서 피살될 정도로 강력범죄가 심각해져 ‘문화의 수도’ 대신 ‘범죄의 수도’라는 악명까지 얻었다. 수도의 이점을 살려 대부분의 투자를 독점하기 시작한 모스크바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로 시 정부에서 줄곧 건설관련 업무를 맡아온 기술관료 출신의 야코블레프 시장은 우선 강한 추진력으로 시 행정을 손에 넣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시의 얼굴’을 바꿔놓는 일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재원은 모두 끌어들이고 직접 현장을 둘러보면서 수많은 재건축과 건설 사업을 벌였다.
‘무리한 계획’이라는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관광객들이 다시 몰려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에르미타쥐 박물관과 마린스키극장(옛 키로프극장) 페트로드보레츠(표트르 대제의 궁전) 등 도시 전체에 널려 있는 풍부한 관광자원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91년 76만명에 불과했던 외국인 방문객은 시장 취임 이듬해인 97년 무려 255만명으로, 2000년에는 350만명으로 늘어났다.
외화가 들어오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해마다 백야(白夜) 기간이 시작되는 5월부터 여름 내내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도시 전체가 활기에 넘쳤다. 98년에는 러시아 전 도시 환경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적극적인 투자유치 노력으로 96년 1억7000만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외국인 투자도 2000년에는 11억6000만달러로 늘어났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도시의 색깔을 바꿔놓은 야코블레프 시장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함께 부시장을 지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0년 집권하면서부터다. 푸틴 대통령은 대학 은사며 정치적 스승이기도 한 소브차크 전 시장의 ‘복수’를 위해 2000년 시장 선거에 겐나디 셀레즈뇨프 하원의장을 내세워 야코블레프 시장을 낙선시키려 했다.
사실상 푸틴 대통령과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던 시장 선거에서 야코블레프 시장은 또다시 예상을 뒤엎고 승리했다. 변혁기의 민주투사를 대체해 도시 재건의 주축을 이룬 전통 테크노크라트는 새 시대 크렘린의 압박으로부터도 시민들에 의해 보호받게 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대통령이 내려보낸 후보를 거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선택은 10년이 갓 넘은 러시아의 지방자치가 험난하나마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재선에 성공한 야코블레프 시장은 이제 21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델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다. 기존의 조선과 기계 산업에 정보통신 산업을 접목, 문화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21세기형 르네상스 도시의 초석을 놓는 것이 그의 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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