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前 하와이 이주민의 꿈▼
1902년 12월22일. 미끄러지듯 제물포항(현재의 인천항)을 빠져나가는 갤릭호 선상에서 김유호(金裕鎬·당시 24세)씨는 멀어져가는 고국의 산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힘차게 울리는 뱃고동만큼 가슴속은 끓어오르는 기대와 두려움으로 울렁거렸다.
태평양의 한복판, 이름조차 낯선 포와도(布蛙島·하와이의 옛이름). “포와도엔 돈나무가 열린다”는 떠도는 얘기가 믿기진 않았지만 아무런 희망 없는 지금보다 더 나쁠 것도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도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일 터인데….
▽첫 이민〓김씨는 제물포 소지주의 아들. 한 차례 일본에 밀항, 해외생활에 눈을 뜬 그는 인천 내리교회 선교사들이 풀어놓는 하와이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김씨는 첫 미주이민자로 기록된 102명에 포함됐다.
선교사들에게 떠듬떠듬 배운 영어실력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귀중한 생존수단이었다. 김씨에겐 농장상점의 회계 일이 맡겨졌고 이 덕택에 나중에 한인이민 중 맨 먼저 자동차를 샀다. 이승만(李承晩·초대 대통령) ‘동지회’ 회장과도 어울리며 독립운동에 돈도 보탰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첫 한인이었다.
그러나 1927년 향수병을 참지 못해 귀국한 것이 화근이었다. 숯 금광 등 한참 뜬다는 사업에 손을 댔다 번 돈을 대부분 날렸다. 결국 해방을 6개월 앞두고 눈을 감았다. 그의 막내아들은 1950년대 다시 하와이로 날아가 이번엔 아버지보다 더 큰 사업체를 키웠다. 하와이 엔지니어링 업계의 대부인 김창원(金昌源·미국명 도널드 김·73)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회장이 그다.
1903년 이민선을 탄 정원재(鄭元在·당시 19세)씨. 전국을 돌며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해큰아들이면서도 감히 홀어머니에게 이민행을 알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양반집 침모(針母)로 동생들의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뙤약빛 아래서 사탕수수 나무를 자르고 옮겨담는 농장일은 고달팠다. 그러나 도박과 유랑으로 소년기를 보낸 정씨는 고행하듯 중노동을 이겨냈다. 허리가 부서져라 일하고 난 뒤 받은 일당 75센트도 차곡차곡 모으니 목돈이 됐다. “이제 됐다” 싶자 정씨는 홀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저는 새 사람이 됐습니다. 돌아가렵니다.”
하와이 땅을 밟은 지 8년만의 일이었다. 정씨의 막내아들인 정행업(鄭行業·68) 전 대전신학대 총장은 “귀국 후 아버님은 집에 서양식 목욕탕을 만들고 땅 개간을 열심히 하는 등 전혀 다른 삶을 사셨다”고 말했다.
김, 정씨처럼 한인 노동자 상당수는 돈을 벌어 귀국했다.1905년 8월까지 고종황제의 윤허를 받아 이민선을 탄 한인은 모두 7200명. 이들의 3분의 2 정도가 하와이에 남거나 미 본토로 넘어가 초창기 한인사회를 만들었다.
▽사진신부〓1898년 부산에서 한의사의 외동딸로 태어난 김순남씨. 드물게 고등교육까지 마친 그에게 1915년 매파(중매쟁이)가 배필감이라며 사진을 보여줬다. 하와이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지만 너무 미남이었다. 그는 사진 속 남편에게 인생을 걸기로 했다.
그러나 호놀룰루 선창에 자신을 마중나온 남편 남순명은 족히 20살이나 많았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일. 결국 그와 결혼해 4남2녀를 낳았다.
‘루나’(현장감독)까지 올랐던 남편이 세상을 뜬 것은 김씨가 39살 때였다. 나이 많았던 남편을 탓하기엔 6남매의 앞날이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인부들 빨래, 바느질, 요리 등 닥치는 대로 일해 돈을 벌었다. 대공황과 태평양 전쟁기를 헤쳐오면서 그는 어느덧 미국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학구열 덕택에 6남매 중 5남매가 뉴욕 등에서 대학을 졸업, 변호사 학자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1980년 김씨는 오랜 지병으로 숨졌다. 사진 한 장 들고 하와이를 찾은 17세 신부는 집과 토지 등 재산보다 더 소중한 자손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유달리 강했던 교육열〓하와이에서는 1850년대 이미 건너온 중국인들과 20년 뒤 밀려온 일본인들이 주류였다. 그러나 아시아계 3대 이민 중 6년제 정규학교를 세운 것은 한인들이 처음이었다. 1906년 당시 학교설립기금으로 모인 돈이 2000달러. 농장 하루 일당이 75센트였던 것을 생각하면 놀랄만한 규모다. 이덕희(李德姬)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부회장은 “농장 한인들이 너도나도 매달 50센트씩 모아 장학기금을 마련했었다”며 “교육을 국권회복의 수단으로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1907년부터 하와이 한인들은 교포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을 냈다. 세금인 의무금을 내지 않으면 국민으로 대접도 하지 않았다. 이 세금은 이후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 박사가 추진해온 각종 독립운동 자금의 밑거름이 됐다.
▼지구촌 한인 이민사회 태동·현황▼
한민족의 이민사(史)는 깊다.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세운 ‘신라방’은 말할 것도 없고 구한말 유민화된 백성들의 해외유랑만도 100년이 넘은 일이다.
▽한인 이민의 효시〓한민족 이민사의 첫 획이라고 할 수 있는 만저우 이민은 스스로 ‘이민’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접경에 살았던 조선인들은 1860, 1869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먹을 것이 떨어지자 중국 땅을 찾았다. 조중(朝中)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은 대부분의 구간에서 한 걸음에 건널 만큼 폭이 좁다. 1996년 허기에 지친 북한 주민들이 그랬듯 구한말 7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옌지(延吉) 등 동북 3성의 주요 도시로 이주, 집성촌을 이뤘다.
옛 소련의 한인 이민들은 이보다 서러운 삶을 살았다. 1930년대 농토를 찾아 두만강 국경을 넘은 이들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 탓에 중앙아시아 오지로 터전을 옮겨야 했고 한국어 등 문화적 전통을 잇지 못했다. 러시아연방(15만명)보다 우즈베키스탄(23만명)에 한인이 더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나라, 저 나라로〓미국 이민보다 2년 늦은 1905년 멕시코 카리브 연안 메리다의 에니깽 농장에 도착한 한인 1000명은 일본인 중개업자들의 사기에 넘어간 것을 뒤늦게 알았다. 노예처럼 혹사당한 이들 중 300명이 1921년 쿠바로 넘어가 남미 이민의 효시를 이룬다.
한일합병은 일본 이민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1910년 700명에 불과했던 일본 이민은 1944년 말에는 200만명 수준에 달했다. 그러나 광복을 맞아 140만명이 귀국선을 타는 바람에 지금은 64만명 정도만 남아 있다.
유럽에는 1963∼1976년 독일로 떠난 1만4000여명의 광원과 간호사가 첫 공식 이민이다. 호주는 이보다 더 늦은 1974년. 1973년 호주 당국이 백호(白濠)주의를 폐지한 것을 틈타 베트남 패망으로 갈 데가 애매해진 베트남 한인들이 태평양을 건넜다.이들이 합법이민이 된 것은 1976년 호주정부의 사면령 덕이었다.
▽걸음마 단계, 한인 네트워크〓140여년동안 전 세계 151개국에 흩어진 565만명의 한인은 철저히 방치돼왔다. 국력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군사정부 이후 해외 한인들이 줄곧 야당을 지원한 탓도 있었다. 정부가 이들을 ‘자원’으로 간주하고 ‘엮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62년 군사정부는 해외이주법을 처음으로 만들었지만 이는 과밀인구 해소와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것으로 해외로 떠난 한인들과는 무관했다.
한인 네트워크는 1993년 24개국 580명의 한인 상공인들이 모인 세계한상(世界韓商)대회가 처음. 한해 전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원으로 싱가포르에서 세계화상(華商)대회가 열린 것이 자극이 됐다.
정부 주도의 네트워크는 1997년 10월 외교부 외곽단체인 ‘재외동포재단’이 유일하다. 그러나 권병현(權丙鉉) 이사장이 “해외동포들이 찾아와 ‘도대체 뭐하는 곳이냐’고 나무라면 반갑더라”고 털어놓을 정도로 재단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재외동포재단법’은 강제이주된 한인을 동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올 10월 열린 세계한상대회는 재외동포재단이 재정 지원을 구실로 행사 개최권을 장악, 그동안 자발적인 모임을 이끌어온 한상 사무국과 갈등을 빚었다. 양창영(楊昶榮) 한상 사무총장은 “세계 어느 나라 정부도 민간 네트워크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재단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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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취재반▽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기자 국제부 ecopark@donga.com
김정안기자 국제부 credo@donga.com
김선우기자 사회1부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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