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1일 미국 뉴저지주 해켄섹 고등법원. 2년 동안 계속됐던 한인들의 법정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자 팰리세이즈 파크 한인들은 환호했다. 이탈리아계 시장이 주도해온 시 당국의 영업시간 제한조치에 대해 조너선 해리스 판사는 “팰리세이즈 파크 상권의 95%를 차지하는 한인 상가의 영업시간을 제한한 것은 한인의 성공적인 삶을 질투하고 시기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판결에 앞서 한인 3000여명이 법원 입구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팰리세이즈 파크 인구 1만6000여명의 40%를 차지하는 한인이 이처럼 뭉치기는 매우 이례적인 일. 승소한 뒤에도 이들은 시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해 시청 앞에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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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에 바빴던 미국 한인에게 정치는 오랫동안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나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유권자 등록운동’이 벌어지고 미국사회 적응의 척도인 ‘기부문화’에도 눈을 돌리는 등 정치의식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
▽한인이 ‘꽉 잡은’ 상권〓뉴욕 맨해튼에 세탁소를 차린 김용환씨(50)는 토요일에도 오후 8시까지 가게를 지킨다. 직원이 30명이나 되지만 뉴욕시내 17개 호텔을 단골로 둔 덕택에 쉴 틈이 없다.
뉴욕시의 세탁소는 모두 5000여개. 이중 60%인 3000여개가 한인 소유다. 연방정부가 세탁관련 환경법안을 마련할 때면 한인세탁협회 회장을 찾아야 한다.
한인이 ‘주름잡는’ 또 다른 시장은 뷔페식 점심을 파는 델리카페와 작은 슈퍼마켓인 델리 그로서리. 뉴욕의 1만3000여개 점포 중 무려 8000여개의 주인이 한인이다. 맨해튼의 델리카페들은 가격이 비싼데도 점심때면 하루 평균 2000∼3000명의 월급쟁이들이 찾고 있다.
두 시장은 과거엔 유대계나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독차지였으나 보다 부지런한 한인에게 상권이 넘어왔다. 유대인 등 이민사회 ‘선배’들이 미 주류사회에 스며들어가는 과정을 이제는 한인이 따라 밟는 셈이다. 1997년 미 경제센서스에 따르면 미국 내 한인업체들의 매출은 연간 460억달러. 고용인원도 33만4000명으로 조사됐다. 최근 수년동안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도 한인의 진출이 두드러져 한인사회의 파워는 갈수록 세지고 있다.
▽미국에서 맞는 추석〓올 9월22일 뉴저지주 팰리세이즈 파크의 오버팩 공원에는 한인과 미국인 등 3만여명이 모였다. 공원 입구엔 ‘제1회 한인 추석 대잔치’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이날 행사가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인의 눈길을 끈 것은 참석자 중 이례적으로 정치인이 많았기 때문. 제임스 맥그리비 뉴저지 주지사는 보좌관을 대신 보냈고 뉴저지 주의회 고든 존슨 의원, 매튜 어헌 의원 등과 뉴저지주의 중소시장들이 참석해 낯선 ‘추석 잔치’를 즐겼다. ‘표가 있으면 어디든 간다’는 미국 정치인들이 한인 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뉴욕시는 최근 내년부터 음력설을 명절로 승인했다. 시의회가 승격안을 통과시킨 것을 시장이 거부했지만 재표결 끝에 만장일치로 의결했던 것. 뉴욕 시내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인 플러싱 주민은 현재 중국계 미국인과 내년 설에 대규모 가두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종문 리 아시아예술문화센터’〓1903년 미국에 뿌리를 내린 샌프란시스코 한인은 이종문(李鍾文·74) 암벡스벤처 회장 얘기만 나오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중국계가 개척해놓은 이 도시 중심가(시청 부근)에 내년 3월20일 ‘종문 리(chongmoon lee) 아시아예술문화센터’가 들어서기 때문. 아시아계 이민자의 이름이 대도시 박물관 이름에 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종근당 창립자인 이종근(李鍾根)씨의 동생인 이 회장은 군사정부의 협력 요청을 뿌리치고 1970년 태평양을 건넜고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컴퓨터 회사를 차려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돈만 벌었다면 이 회장의 성공기는 흔한 축재이야기 중 하나에 그쳤을 것이다. 그는 1999년 예산이 모자라 문을 닫게 된 아시아예술박물관 내 한국관을 지원한 것을 계기로 모두 1600만달러를 기부해 샌프란시스코 시민이 총동원된 ‘박물관 살리기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유고명(劉高明) 샌프란시스코 의대 국제진료센터 고문은 “시장이 기공식에서 같이 삽을 뜬 사람은 이 회장밖에 없다”며 “그는 수십년간의 기업활동보다도 단 한번의 기부로 한인의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뿌듯해했다.
▽‘투표가 살 길이다’〓미국 내 한인이 선거권을 가지려면 미국 시민권을 얻어 유권자로 등록해야 한다. 유권자등록운동은 1980년대 후반 점화됐지만 활발해진 것은 최근이다. 정치 사회적 영향력은 기부만으로는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지난해 9월 뉴욕 퀸스 카운티에는 한인 시민권 취득자가 늘면서 드디어 한글로 된 유권자등록 용지가 처음 배포됐다.
그러나 미주 한인사회 전체를 보면 유권자등록과 투표참여율은 아직 미흡하다. 뉴욕 일대 40만명이 넘는 한인 중 시민권자가 38%에 그치고 있고 그나마 이중 유권자등록을 하는 사람은 절반을 넘지 못한다. 더욱이 유권자등록을 해놓고도 투표장에 가지 않는 사람이 80%에 달한다.
뉴욕 한인회 박준구 부회장(55)은 “그래도 유권자등록운동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큰 수확”이라며 “투표율도 선거 때마다 조금씩 올라간다”고 밝혔다. 한미연합회(KAC) 4·29센터 존 유 소장(41)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권리를 행사하는 수밖에 없다”며 “한인이 뒤늦게나마 미국에서 사는 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유대인들의 조언▼
“번거로울 것도 없습니다. 워낙 소수민족이 많이 찾아오거든요.”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에 자리잡은 전미 유대인위원회 뉴욕지부. 앤 샤퍼 이사(사진)는 “유대인위원회는 500만 유대인의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한 세미나를 많이 연다”며 “멀리서 온 한국기자에게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1906년에 설립된 ‘유대인위원회’는 미국 내 소수민족 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단체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단체로 꼽힌다. 산하 30개 지부 중에서도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지부의 영향력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미국 이민사는 한인보다 300년이나 앞선다. 한인이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딘 1903년, 미국의 유대인은 이미 150만명을 넘어섰다.
샤퍼 이사에게 대뜸 ‘소수민족으로 미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물었다. 조지프 리버맨 전 민주당 부통령후보와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 등 워싱턴 정가와 뉴욕 월가를 쥐락펴락하는 유대인이 많지만 이들의 선조도 이주 초기엔 극심한 차별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는 “어느 민족이든 1세대 이민들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신의 가족에게만 정성을 쏟는다”며 “미국 내 한인이 겪는 시행착오는 자연스럽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민 2세대에 들어서면 미국 자체의 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 문화집단과 어울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한다”고 덧붙였다.
샤퍼 이사와의 인터뷰 내용 중 주목할 만한 대목은 ‘고유의 풍습과 문화의 끈을 놓지 말라’는 충고.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는 자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미국 내 유대인 사회는 크리스마스 등 미국 최대의 명절이 아닌 하누카 등 고유명절을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민사회 성공 비결 5가지
△미국 사회가 ‘기회의 땅’이며 이 기회를 찾기
위해 도미(渡美)했음을 잊지 않는다
△정치감각과 정치인을 키운다
△정치를 지렛대로 쓰려면 기부금을 모아야 한다
△교육을 통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현안이 생기면 정치인들에게 e메일과 서신을
집단으로 보낸다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 국제부기자 ecopark@donga.com
김정안 국제부기자 credo@donga.com
김선우 사회1부기자 sublime@donga.com
강병기 사진부기자 arch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