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이민 100년]<3>“재능으로… 땀으로… ” 한국魂 알린다

  • 입력 2003년 1월 6일 17시 44분


▼문화예술계 파워▼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을 때는 열심히 배우는 것만 생각했고 그 다음엔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에만 몰두했었죠. 지금 세계 1급 가수로 평가받고 있으니 제가 키워온 꿈보다 더 많이 이룬 것이죠.”

뉴욕 타임스가 ‘디바(가창력이 뛰어난 여가수를 지칭함)’라고 표현한 소프라노 홍혜경씨(45)는 지난해 말 스칼라좌에서의 공연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1984년 데뷔 이후 세계 최고 수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프리마 돈나 자리를 굳게 지켜온 그는 “30년 미국 생활에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차별이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당당하게 뛰었다”고 회상했다.

수많은 민족이 함께 사는 미국. 약간 먼저 온 사람이 다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라도 노력한 만큼 얻는다’는 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었다. 이것이 낯선 땅에서 그를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한 힘이었다.

“미국인들은 알 수 없는 한국계로서의 경험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겠습니다.”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남(23)은 ‘아시아계 또는 한국계 대표’ 중 한 사람으로 미국 영화계에서 뛰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빈티지 진 차림까지 뉴욕의 젊은이와 똑같지만 “나는 그들(미국인)과 다르다”며 “기회가 되면 한국 영화계에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해 3월 말 개봉 예정인 영화 ‘만점(滿點)’에서 시험지를 훔치는 6명의 학생 역은 당초엔 모두 백인 배우가 맡기로 돼 있었다. 뉴욕 진출 3년 만에 그 벽을 뚫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뉴욕에서 연기 수업을 받으며 영화제작자에게 수없이 편지를 쓰고 오디션에서 유난히 열심히 한 그에게 마침내 배역이 맡겨졌다. 이 영화를 통해 지난해 뉴욕 영화계에서 ‘만점’을 받은 그는 LA 타임스가 선정한 ‘2003년에 주목할 남자배우’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올해 파라마운트사와 2편의 영화를 더 찍기로 협의 중이다.

▼연재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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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모 남기웅(55), 신경희씨(52)는 30여년 전 이민길에 올라 아르헨티나를 거쳐 호주에서 의류 도소매업을 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국생활에 익숙해진 3남매는 지금은 국제인으로 뛰고 있지만 때로는 외톨이로 살기도 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교사로 일하는 누나 산드라(28)가 쓰고 있는 동화 ‘외계인’처럼. 그 외로움을 춤으로 승화시킨 형 마틴(25)은 영국 런던의 국립극장에서 활약 중이다.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힘’을 반영한다고 한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의 문화계는 이민자들의 파워를 재볼 수 있는 저울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문화계 인사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문화계의 한인들이 더 큰 기회를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

박양우 뉴욕 한국문화원장은 “뛰어난 재능과 창의력을 인정받아 스타덤에 오르는 한인 예술가가 점점 많아져 다행”이라면서도 “주류 사회 진출은 여전히 미미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 마케팅 분야의 한인 파워가 특히 미약한 것이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문학 분야에선 이창래씨의 베스트셀러 ‘네이티브 스피커’ ‘제스처 인생’ 등이 대학 등의 필독서로 지정되는 등 한인 작가들이 조명을 받고 있다. 과거엔 김은국의 ‘순교자’(1964년)처럼 영어로 출판된 작품이 극소수여서 ‘서울시 나성(羅城·로스앤젤레스)구’라는 표현(장소현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무대만 미국 땅’인 셈이었다.

미술 분야에선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와 설치미술가 강익중씨가 뚜렷한 위치를 구축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한국의 젊고 의욕적인 미술가들이 뉴욕 등지로 몰려드는 수에 비하면 활약상은 부진한 편이다. 뉴욕의 미술 관계자는 “예술 분야를 사실상 주름잡는 유대인들이 한국 미술가들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한인 작품이 주류 시장에 선을 보이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음악의 경우도 ‘보이지 않는 천장’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1961년 미국에 유학했던 뉴욕의 한국음악재단 이순희 단장(소프라노)은 이렇게 말한다.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엑스, 게릭 올슨이 현재 미국에서 1류급으로 활약하게 된 것은 그들의 실력 외에 유대인들의 막강한 후원이 따랐던 덕분입니다. 당시 실력이 더 좋았던 백건우씨는 그런 뒷받침을 받지 못해 유럽 무대로 진출해야 했어요. 이런 일에 자극받아 음악재단을 결성, 18년간 한인 음악가 45명의 뉴욕 리사이틀을 후원해왔습니다.”

영화계에선 1936년 첫 영화에 출연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 필립 안이 유명했으며 군위안부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김대실 감독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인종 장벽은 현실이지만 흑인이나 라틴계도 장벽을 넘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면서 “한국인도 그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새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아시아 이민사회를 그린 뮤지컬 ‘플라워 드럼송’에는 랜델 덕 김, 훈 리, 마쿠스 최 등 한인 배우 3명이 다른 아시아계 배우들과 함께 출연 중이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하버드大 2세들은…▼

“보스턴 시내 구석에 박힌 선술집에서 자기들만 어울리는 한국계 학생들이 싫다. 폐쇄적인 그들이 캠퍼스를 망치고 있다.”

지난해 미국 하버드대 교지인 ‘크림슨’ 주말판에 실려 큰 파장을 일으킨 한 미국 학생의 기고문 중 일부다. 선망의 대상인 명문 아이비리그에 입성한 한국계 학생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공개적인 비난까지 듣게 됐을까.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최근 하버드대 생화학과 3학년과 언어학과 4학년에 각각 재학 중인 교포 2세 애런 리와 찰스 장을 e메일을 통해 만나봤다. 리(2000년), 장씨(1999년)는 고교 졸업시 미 대통령상 수상자로, 학내 생활기록을 ‘완벽한 학생들’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어내 국내에서 적잖은 화제를 모았다. 리씨는 “1세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자라온 2세들도 결국 그들을 닮는 것 같다”며 “이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다른 인종들과의 융합과 상호 이해가 절대적인 이곳 사회에서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크림슨 기고문 중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비하적인 표현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충고도 많다는 것. 이와 달리 장씨는 “의도적으로 같은 인종의 친구들만 사귀는 것은 잘못이지만 비슷한 점이 많은 학우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근 한국계 학생들의 하버드대 진출이 크게 늘었지만 아직도 한국계를 포함해 아시아계 학생은 전체의 5% 안팎에 머물고 있다.

두 사람은 “한국계 학생들은 영향력이 큰 정치, 언론계보다 돈벌이가 보장되는 의료, 엔지니어 쪽에서만 일하려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선술집에서 끼리끼리 어울리는 폐쇄성이 직업관에도 나타난다는 지적. 당연히 한인들의 위상은 ‘중심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리씨는 “개척정신이 충만한 이 사회에서 한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안전한’ 길을 택하라고 강요한다”고 했고, 장씨는 “소수계가 주류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겠느냐는 자포자기도 한몫 하는 것 같다”고 거들었다.

두 사람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갓난아기 때 건너가 한국이 아무래도 낯설다. ‘당신은 얼마나 한국적인가’라는 질문에 리씨는 “술을 잘 못 마셔 한국인 되기는 틀렸다”고 농담 섞인 답변을 했다. 그런데도 월드컵 경기 등에서 나타난 한국의 역동성은 두 사람을 크게 매료시켰다고 한다.

리씨는 인터뷰를 다음과 같이 맺었다.

“내 속엔 항상 ‘한국’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자라며 터득한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사고 또한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두 문화의 혼합체인 ‘코리안 아메리칸’이란 점이 자랑스럽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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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보는 이민 100년사

▼특별취재팀▼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 국제부기자 ecopark@donga.com

김정안 국제부기자 credo@donga.com

김선우 사회1부기자 sublime@donga.com

강병기 사진부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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