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한 김씨 부부는 한인교회에서 1주에 3번 여는 한글학교와 사춘기 학생들을 지도하는 청소년회가 미더워 아이들을 한인교회에 보내고 있다.
지난해 7월 남편(41), 두살배기 딸과 뉴욕으로 이민 온 손모씨(31)는 한인교회에 가야 마음이 안정된다. 하루 12시간씩 식당일을 하는 남편과 자기 곁을 떠나지 않는 딸 사이에서 쌓이는 이민 초기의 스트레스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야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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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은 어디가 싸고, 아이 학교는 어디가 괜찮으며, 어떤 일자리가 좋은지 생활정보가 쏟아지는 곳 역시 교회다. 손씨는 “넓은 집 정원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광경을 상상하며 미국에 왔지만 실상은 거리가 멀다”며 “그나마 한인교회가 있기에 미국에 정을 붙이고 산다”고 고마워했다.
이민 5년째인 김대현씨(42)는 교회에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랜다.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건너온 그는 “주중에는 바빠 한국 생각이 떠오르지 않지만 주일에 교회에서는 원 없이 고국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수감사절 샌프란시스코 시내 유다스트리트의 상항(桑港)연합감리교회. 예배가 끝나자 200여명의 교인들은 모두 지하식당으로 내려가 음식을 나눠 먹으며 떠들썩하게 얘기꽃을 피웠다. 이곳저곳에서 새 식구들을 소개하거나 어른들의 안부를 묻는 장면은 한국의 교회들과는 또 다른 점이었다.
박장희 집사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이 1903년 9월 이 교회를 세운 이후 한인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교회사(史)에 스며 있다”며 “한인교회는 이민사회를 지탱해온 중심”이라고 자랑했다.
호놀룰루시 키아모쿠가(街)에 세워진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도 가족적인 분위기는 마찬가지. 100년 전 하와이 한인이민이 처음 세운 이 교회도 정결한 ‘찬양의 장(場)’이라기보다는 한인들의 친목회 같은 분위기가 더 많이 배어났다.
미주 한인들을 한데 묶어온 교회의 힘은 첫 노동이민을 호놀룰루항에 풀어놓은 갤릭호에서 시작됐다. 이덕희(李德姬)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부회장은 “102명의 첫 이민 중 28명의 가장(家長)이 인천내리교회 신도였다”며 “이들이 2개월 뒤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인교회의 싹을 틔웠다”고 말했다.
초창기 한인교회는 미주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이승만(李承晩) 임시정부 대통령의 한국사와 한국어 강좌가 한인기독교회에서 이뤄졌고 무장항일운동을 주창했던 박용만 선생도 장로교의 후원을 받아 네브래스카에 소년병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에게 일제 요인암살 등 거사용 자금을 보낸 안창호 선생, 심영신 여사 등도 교회와 독립운동단체를 통해 돈을 끌어모았다.
이민선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한인들이 다니던 교회는 모두 14개였다. 1905년엔 에바 농장의 한인교인들이 15달러의 월급 중 2달러씩을 떼어 모아 첫 교회건물을 세웠다.
한인교회는 지난해 3197개로 늘어날 정도로 폭증했다. 한인들의 신학 관련 기관도 덩달아 88개로 늘었고 기도원 및 수양관도 46개로 조사됐다.
한인교회가 융성한 이유는 생활정보, 심리적 안정, 사교 기회 등을 제공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마당이 되고 있기 때문. 뉴욕 퀸스카운티의 안디옥침례교회 이선일 목사(40)는 “이민 1∼3세를 한꺼번에 만나는 목사는 ‘가족 상담원’이나 마찬가지”라며 “가족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목사가 정신과 의사보다 낫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00년의 연륜이 쌓인 한인교회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신도들이 이민 1세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갈수록 이민 2, 3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것. 한국어를 잘 못하는 2, 3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영어예배를 보는 한인교회가 290개에 불과한 것이 좋은 예.
샌프란시스코의 P목사는 지난해 말 “연로한 1세 신도들은 고문으로 물러나고 교회 사무는 청장년층이 봤으면 좋겠다”고 설득하다 1세 신도들에게 “누가 키운 교회인데 우리를 내쫓으려 하느냐”며 탄핵 대상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가 내실화보다 ‘개척’에 매달리는 것도 문제다. 한인사회의 구심점이란 역할에 걸맞은 문화 봉사사업 등이 소홀해진 것.
신기욱 스탠퍼드대 교수는 “그 많은 교회들이 100년 동안 각종 출판물이나 조형물 등 한인사회의 문화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며 “한인교회도 지역에 봉사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삐꺽이는 한인회▼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민사지법은 14일 “2000년 개정된 한인회 정관은 위법”이라며 원고인 P씨의 손을 들어줬다. 회장의 연임이 가능하도록 정관을 고치기 위해선 한인회 전 회원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며 따라서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연임 개정안은 의미가 없다는 판결. 이날 판결로 회장 자리를 둘러싸고 한인회를 둘로 갈라놓았던 갈등은 일단 법적으로 정리가 됐지만 감정의 앙금은 더욱 깊어졌다.
하와이에서도 최근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하와이 한인회 회장 자리를 놓고 몇몇 인사들이 다툼을 벌이다 결국 지난해 말 현 집행부에 맞선 일부 교민이 ‘오하후 교민한인회’를 별도로 만들어 갈라선 것. 교민 S씨는 “하와이 한인회가 주 정부에 ‘한인’이라는 용어가 붙은 관련 단체명을 한꺼번에 등록해 놓는 바람에 마땅한 이름이 없어 교민한인회로 작명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갈등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가 잇따르면서 심화됐다.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서는 5개의 한인회가 활동한다. 북부뉴저지, 남부뉴저지, 맨해튼, 플러싱, 뉴욕 전체 한인회가 제각기 움직인다. 서로 인접해 있어 연대가 쉬울 것으로 보이지만 북부뉴저지 한인회 사람들은 남부뉴저지 한인회가 무엇을 하는지, 누가 회장인지도 잘 모른다.
한인회는 한인교회와 함께 한인을 묶어낼 수 있는 네트워크의 축. 그러나 잦은 정통성 시비와 한인들의 무관심으로 ‘이민 1세들의 친목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미연합회(KAC) 등 이민 1.5, 2세들이 중심이 된 후발 단체들이 권익보호를 위해 미 주류사회 내 활동을 강화하는 것과 비교된다. 뉴욕 총영사관의 한 직원도 “한인회는 친목단체일 뿐인데 한국에서는 과대 포장돼 있다”고 평가 절하했다.
반면 “어떤 형태로든 함께 모여 활동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한인회의 체질 개선을 위해 뛰는 젊은 한인도 적지 않다.
문제는 자발적으로 구성된 한인회가 벌이는 각종 사업에 한국 정부의 예산, 즉 국민 세금이 투입된다는 점. 2001년 전 세계 각종 한인회에 20억원이 지원됐고 이중 북미지역에는 6억9000만원이 할당됐다. 물론 한인회가 당초 요청한 자금 규모는 이것의 10배 수준.
한인회 지원업무를 맡은 재외동포재단 관계자는 “한인회의 성격이 모두 다른 데다 현지 공관과도 마찰이 적잖아 제대로 된 한인단체 목록조차 만들기 어렵다”며 “효과적인 재외국민 정책을 펴기 위해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털어놓았다.
▼특별취재팀▼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 국제부기자 ecopark@donga.com
김정안 국제부기자 credo@donga.com
김선우 사회1부기자 sublime@donga.com
강병기 사진부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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