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이민 100주년]<7>동포들이 말하는 한국의 이민정책

  • 입력 2003년 2월 3일 19시 03분


국내에서 일하는 캐나다 국적 한인에게 발급된 재외동포 신고거소증. 해외 한인들은 2년마다 발급되는 이 신분증만으로는 신용카드 사용 등 기초적인 경제생활도 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김경제기자
국내에서 일하는 캐나다 국적 한인에게 발급된 재외동포 신고거소증. 해외 한인들은 2년마다 발급되는 이 신분증만으로는 신용카드 사용 등 기초적인 경제생활도 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김경제기자
“시민권을 왜 땁니까. 저는 대한민국 사람인데요.”

고모씨(42)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콜택시를 운전한다. 대기업의 미국 주재원으로 있다가 돈을 더 벌 욕심에 그냥 눌러앉은 게 벌써 15년째다.

고씨가 미국 국적을 얻게 되는 시민권이 아니라 영주권을 고집하는 것은 돌아갈 때를 위해서다. 한국에서 이중국적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 잡화점 세탁소에 택시운전까지 해본 그는 조금만 더 고생하면 소원대로 서울에 번듯한 일식집을 차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힘들 때마다 이미 부장 이사까지 승진해 버린 옛 회사 동료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문다. 고씨는 “미국으로 ‘도망’간 나 같은 사람이 행여 빈손으로 돌아가면 사람 대우나 받을까요”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연재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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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워싱턴으로 이민 간 권영희씨(가명·39·여) 부부. 더 늦기 전에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욕망에 과감히 미국행을 택했다. 영주권을 받았지만 4년쯤 뒤 되돌아갈 생각도 있다. 서울의 집도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둬 사실상 ‘반(半) 이민’인 셈. 권씨 남편은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미국에 온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며 실명을 쓰지 말 것을 요청했다.

고교시절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김모씨(30)는 미국에서 공대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와 외국계 회사에 입사했다. 대학시절 미국 시민권을 얻은 김씨는 ‘재외동포 신고거소증’을 들고 다니지만 한국에서 자신이 ‘유령’처럼 떠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얼마 전 부모님 도움으로 경기 성남시 분당에 집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집을 샀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어 신고를 못했죠. 관할구청에 갔더니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의 집’처럼 돼 있더군요.”

재외동포 신고거소증이 실제 생활에선 무용지물이라는 얘기. 김씨는 “어렸을 때 이민 간 것이 죄는 아닐텐데 나 같은 사람을 이방인으로 보는 한국의 인식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미주이민 100년사는 초기 노동 이민에서 최근엔 보다 나은 생활의 질을 찾아 떠나는, ‘업그레이드(upgrade)형’ 이민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아직도 이들을 ‘고국을 등진 도망자’쯤으로 평가하기 일쑤다.

박필서 신세계이주공사 사장은 “90년대 중반까지는 ‘탈출형’ 이민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이민자들의 학력이나 재산이 한국인의 평균 이상”이라고 말했다. ‘오죽하면 외국 나가서 살겠느냐’는 인식도 ‘도전정신과 능력이 있으니 이민 간다’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

유니세프 뉴욕본부에서 일하는 반현희씨(26)는 아예 국적을 떠난 삶을 추구한다. 지난해 3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유엔의 ‘초급 전문가(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 5명 중 1명으로 발탁됐다.

미국에서 고교까지 다니고 연세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친 그는 2000년 9월 유엔본부 경제사회국에서 인턴으로 일한 것을 계기로 평생을 ‘세계인’으로 살기로 했다. 반씨는 “요즘 세상에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했다.

1990년대 들어 미주이민사가 새로 쓰이고 있지만 한국 정부의 이민정책은 사실상 무책(無策)이나 마찬가지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가겠다면 보내고 안 간다면 그냥 두는 것’이 이민정책이라는 것.

반면 이스라엘은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고국으로 돌아오는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관청까지 뒀다. 일본도 1930년대부터 융자까지 지원하며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

호서대 양창영(楊昶榮·국제개발학) 교수는 “소국일수록 이민자들의 힘을 키워 자국 이익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며 “한국도 전 세계에 퍼진 해외동포를 ‘재산’으로 인식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를 맞아 미주한인 등 재외동포의 참정권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민 간 한인들도 시민권 등을 얻기 전까진 사실상 대한민국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 프랑스 파리의 한인신문 ‘오니바’의 편집인 김제완씨(45)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한국만이 해외 한인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3공화국 시절 제6, 7대 대통령선거와 7, 8대 총선 때는 당시 서독의 한인 광원 및 간호사 등이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선거에 불리한 것으로 나타나자 폐지했다.

한국 정부의 이민정책이 무책으로 일관하는 사이 미주 한인들의 처지는 9·11테러 이후 더욱 곤란해지고 있다. 영주권 소지자들에 대한 이민당국의 관리가 강화된 탓이다. 뉴욕 플러싱의 전 한인회장 변천수씨(65)는 “미국에서도 영주권만 가지고 살기는 힘든 시대가 됐다”며 “한국 정부가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해외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학교때 이민간 20代 사례▼

비행기를 타고 10여시간이면 닿는 한국. 그러나 일할 의욕이 넘치는 젊은 미주 한인에게 한국은 ‘먼 땅’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한 동포들도 ‘재외동포 신고거소증’만 가지면 한국인과 똑같이 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 하지만 이들은 이중국적 허용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어쩔 수 없이 미주 시민권과 한국 국적을 동시에 취득한 젊은 한인과 한국 국적이 없는 미주 한인이 털어놓는 고국생활에서의 애환을 ‘말말말’로 풀어 본다.

▽군대를 가지 않았다고 멸시받을 땐 이민간 것이 후회된다=국내 외국기업 T사에서 일하는 미국 시민권자 C씨(30). 중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고국 근무를 희망해 취업했다. 국내 거주 2년째인 그는 “조금 친해질 만하면 ‘군대 다녀왔느냐’고 묻는다”며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C씨는 “몇 번이나 머리카락을 외국인처럼 노랗게 물들이고 싶었다”며 “한국사회는 이곳에서 일하는 외국인이나 이민자에게 특별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용카드도 발급 못 받고, 휴대전화도 못 사고 인터넷 회원가입도 안 돼=중학교 때 캐나다로 건너간 Y씨(27). 철이 들어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고 싶어 국내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주민등록번호’(재외동포 신고거소증 번호) 뒷자리가 ‘5’로 시작하는 캐나다 시민권자. 부모로부터 엄격한 한국어 교육을 받아온 그는 한국어가 능통하지만 국내에선 외톨이처럼 지낸다.

신용카드를 발급 받을 수 없고 휴대전화도 친척 이름으로 샀다. 가장 불편한 점은 ‘주민등록번호’. 국내기업에 취업하길 희망하는 Y씨는 입사희망서를 쓸 때마다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선 깜짝 놀랐다.

각종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가입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 결국 고국은 Y씨에게 최소한의 경제생활도 버거운 곳이 됐다. Y씨는 “이런 불편함을 없앤다며 지난해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새로운 번호를 발급했지만 현장에선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허탈해 했다.

▽그럼 한국 국적을 포기하셔야죠=군복무를 마친 K씨(28). 부친이 미국에서 근무할 때 태어나 미국 시민권과 한국 국적을 모두 가지고 있다.

K씨는 지난해 군복무를 마친 뒤 유학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다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를 만나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돌아온 것은 “유학가면 여러모로 미국 시민권이 편한데 뭐하러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느냐”는 답변. K씨는 “군대만 다녀오면 ‘국민이건 미국시민이건 신경 안 쓴다’는 말로 들려 씁쓸했다”고 말했다.

▼특별 취재팀▼

총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 국제부기자 ecopark@donga.com

김정안 국제부기자 credo@donga.com

김선우 사회1부기자 sublime@donga.com

강병기 사진부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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