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 북부 사막을 가로질러 이라크 국경을 넘었다가 십자포화의 사선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영국 TV 방송 ITN의 다니엘 데무스티에르 기자(41)를 25일 만났다.
그의 얼굴과 팔목,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와 한 팀을 이뤘던 베테랑 종군기자 테리 로이드(51)는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동료 카메라 기자인 프레드 네라크와 현지 안내인 후세인 오스만은 실종된 상태다. 22일의 일이었다. 사고가 난 다음날 쿠웨이트시의 사피르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몹시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비교적 안정됐다.
―심경은…. “괜찮아졌다. 하지만 날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런 일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고 직후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구체적인 순간들이 떠올라 괴롭다.” ―어떻게 살아 나왔는가. 미군이 구조했나.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 않았다. 내 발로 걸어나와 뒤에 오던 영국 신문 선데이메일팀의 차를 타고 돌아왔다.” ITN은 사고 직후 특별팀을 파견해 사고 수습에 나섰지만 아직도 로이드 기자의 시신과 실종된 두 사람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고 순간은…. “기억하기 괴롭다.” 그는 선데이메일 등에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지프 두 대에 나눠 타고 이라크 남부 도시 바스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멀리서 이라크군으로 보이는 픽업 트럭 한 대와 4륜구동 지프가 접근해왔다. 한 대는 우리를 따라 붙어 함께 나란히 바스라를 향했다. 미군 쪽에서 갑자기 기관총 사격과 함께 탱크의 포격이 시작됐다. 총알들이 비 오듯 지프를 향해 쏟아졌다. 창문이 부서지고 차체에 구멍이 뚫렸다. 그런 뒤 차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옆자리를 보니 차 문이 열려 있고 테리가 사라졌다. 나는 도랑에 차를 처박고 도망쳐 나왔다.” 네라크씨와 오스만씨가 탄 지프 역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왜 잠입을 시도했는가. “항상 그래왔다. 우리는 군 당국의 발표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확인한다. 미군이 언론에 제공한 종군 서비스인 ‘동행취재(embed)’에 응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미군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 당국은 어디까지 진격했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거짓으로 탄로 나곤 했다. 이번에도 미영 연합군이 움카스르를 사흘 전에 점령했다고 말했지만 거짓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는 카메라 취재 경력 15년. 80년대 이스라엘군의 베이루트 진격, 91년 걸프전 때의 바그다드, 98년 코소보, 그리고 2001년 아프가니스탄까지 숱한 전장을 누볐다. 이번에 숨진 로이드씨는 경력 20년의 고참 종군기자였다. 88년 이라크가 쿠르드족의 할라브자 마을에 화학무기를 떨어뜨려 5000명을 살해했을 때 처음 현장에 도착한 기자였으며 93년 3월 세르비아인들이 집단 학살한 크로아티아인들의 무덤을 찾아낸 것도 그였다. 97년에는 캄보디아 내전을 취재한 뒤 곧바로 눈 덮인 험준한 몬테네그로의 산악지대를 넘어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코소보에서의 세르비아 잔학상을 고발했다. ―미군은 무모한 취재였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미군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도 한국에서 TV나 통신을 보면서 기사를 쓰지 왜 쿠웨이트까지 와 있는가. 기자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물론 최대한 조심해야 하지만 전쟁은 항상 예측불허다.” ―미군은 총격에 대해 설명했는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돌아온 뒤로 보자는 연락도 없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실종된 두 동료를 찾을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다시 전쟁이 터지면 또 뛰어들 것인가’라고 묻고 싶었지만 너무 가혹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왜 그처럼 위험한 곳에 뛰어드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언론인으로서의 본능이다. 나는 현장에 있고 싶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쿠웨이트=홍은택특파원 eunta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