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3일 새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지중해는 사나웠다. 마치 그릇을 좌우로 흔들면 담겨 있는 물이 솟구치는 것처럼 그날 지중해는 무정형의 파도를 일으켰다. 현지 안내인 모하메드 브리샤(27)는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거친 바다 속에 왕궁이 있다. 용왕이 사는 궁전은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일대에는 기원후 320년부터 1303년까지 약 1000년 동안 연쇄적인 지진이 있었다. 365년 여름의 지진 강도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20%가량이 물 속에 잠겼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년∼기원전 30년)의 궁전도 이때 가라앉아 1600여년을 바다 속에 있었다.
이 궁전의 마지막 주인은 클레오파트라 7세. 절세가인으로 알려진 그는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와 실력자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왕조를 지켰지만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이 불가피해지자 독사에게 가슴을 물게 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2000여년 뒤 한 프랑스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프랑크 고디오(55). 프랑스와 여러 국가의 경제고문으로 15년간 일하다 고고학자로 변신한 아마추어 학자다. 96년 그는 알렉산드리아 이스턴항의 수심 9m에서 잠자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깨웠다.
바다 속으로 다이빙한 그의 팀이 십수세기 동안 켜켜이 가라앉은 침전물을 걷어내자 원주 기둥과 동상, 스핑크스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 디스커버리와 유럽의 힐티재단의 지원으로 해저탐험을 하고 있는 그는 2001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인근 해역에서 8세기 지진으로 사라진 도시 헤라클레이온도 찾아냈다. 그러나 그의 발굴은 이전부터 이곳에서 발굴작업을 해온 다른 고고학자들의 연구가 축적돼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
같은 프랑스인이자 저명한 고고학자인 장 이브 엠페러 박사는 1990년 알렉산드리아연구소(CEA)를 세우고 그리스인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부른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해저 유적을 비롯해 수많은 유적들을 발굴해왔다. 프랑스의 외무부와 교육부, 문화부가 이 연구소의 발굴을 후원하고 있다.
이 연구소 자체가 하나의 작은 지구촌이다. 프랑스 튀니지 독일 스페인 영국 이집트 등 6개국 출신 20명이 함께 일하며 지금까지 30개가 넘는 스핑크스와 높이 13m가 넘는 육중한 동상 6개 등 많은 유적과 유물들을 찾아냈다. 영국인 공보책임자인 콜린 클레먼트는 “우리는 죽은 역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파올로 갈로 박사가 이끄는 이탈리아 고고학발굴팀(MAIA)은 알렉산드리아에서 4㎞ 떨어진 넬슨 아일랜드에서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넬슨 아일랜드는 나폴레옹의 해군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넬슨 제독의 이름을 딴 섬으로 최근에는 나폴레옹군의 군함이 발견돼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미국의 바다유적연구소(INA)는 홍해의 해저 유적을 발굴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헬레니즘 해상유적보존연구소는 알렉산드리아 해안을 훑고 있다. 폴란드팀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 주변을 발굴하고 있다.
건져낸 유물은 심하게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에 INA의 보존실험실에서 복원작업이 이뤄진다. 이집트에 매료돼 3년 전부터 이곳에 와 있는 미국인 에릭 노드그런 실험실 소장은 “역사는 실험실에서 완성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노력은 이집트에도 자극을 줘 96년 이집트의 유물최고위원회(SCA)에 해저유적탐사국이 신설됐다. 이후 탐사국과 각국 팀들의 공조로 속속 바다 속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알라 마흐러스 탐사국장은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수중음파탐지기, 수중촬영 카메라와 같은 첨단장비를 가져와 본격적인 해저 탐사가 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 페르시아 문명이 어우러져 있는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며 국제적인 관심과 발굴 작업을 환영했다.
지금은 구체적인 유적 발굴 단계를 지나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지형과 시가지에 대한 전모를 그리고 있는 중. 마치 새로 도시를 설계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고대도시가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완전 복원에 이르기까지는 앞으로도 10년은 더 소요될 전망.
클레먼트씨는 “알렉산드리아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땅 속을 파 들어가면 마치 승강기를 타고 지하층으로 내려가듯이 연대기순으로 이슬람문명 기독교문명 로마문명 그리스문명 파라오문명이 차례로 나타난다는 것.
도시 자체가 코스모폴리스(국제도시)의 운명을 타고났다. 이 도시를 세운 알렉산더대왕은 모든 사람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만인동포관(觀)’을 전파했다. 그의 사상은 고대 알렉산드리아를 복원하려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재탄생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바다유적硏 홀데인 소장 "발굴 희열에 중독돼"▼
미국 바다유적연구소(INA)의 더글러스 홀데인 이집트 담당 소장(사진)은 알렉산드리아에서 10년 동안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발굴해 왔으며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유적복원 실험실도 만들어 이집트 해저탐사의 기초를 제공했다. 대학에서는 그리스 로마 역사를, 석박사 과정에서는 이슬람 역사를 전공했다. 2월24일 그를 만나 해저탐사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육지 작업과 얼마나 다른가.
“매우 위험한 작업이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거나 너무 빨리 지상으로 올라오려고 할 때 갑자기 정신을 잃을 수 있다. 탈수증에 걸릴 위험도 크다. 무엇보다 하루에 한 사람이 오전 30분, 오후 30분씩 모두 1시간밖에 작업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인내심이 중요한 덕목이다.”
―중동에서는 테러의 위험이 상존하는데….
“우리는 보통 육지에서 20㎞ 떨어진 험한 바다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테러의 위험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고의 위험은 항상 뒤따라 다닌다. 1999년 홍해에서 발굴할 때 인근 해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군사작전을 벌였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찔했다.”
―상어가 공격할 수 있는가.
“상어는 알려진 것처럼 공격적이지 않다.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한번은 상어가 발굴요원의 1m 전방까지 다가왔지만 물지는 않았다.”
―언제 귀국할 예정인가.
“어떻게 10년이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발굴은 하나의 중독이다. 발견의 중독이다. 3000년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파라오 왕비의 유물에 손을 댈 때의 벅찬 감격이란…. 중요한 유물만이 아니다. 1183년에 가라앉은 배에서 선장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를 찾아냈을 때 시공을 초월해 그 선장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 이 중독은 정말 끊기 어려운 유혹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의 신부(bride)’ 또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30㎞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도시.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의 압정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더대왕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렉산더대왕의 사후 그의 장군 중 1명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처음엔 속주(屬州)의 장관으로서 이집트를 다스리다 기원전 305년 독립을 선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15세(케사리온)의 사망으로 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300년간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명이 결합된 헬레니즘시대의 문화와 경제 중심지로서 번성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0년대인 오늘날의 세계 중심도시가 뉴욕이듯 서기 1년 세계의 중심도시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신성로마제국까지 포함해 그 이후 700년간 로마의 속주가 됐다. 이 기간에 콥틱(coptic)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문명을 꽃피웠으며 640년 아랍, 1517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에 각각 들어간 뒤로는 이슬람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1801년에는 프랑스 나폴레옹 1세가 점령했고 1882년부터 1954년까지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아 그야말로 다양한 문명과 문화가 도시에 녹아있다. 지금은 카이로에 이은 이집트 제2의 도시로서 550만명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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