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도서관을 한 바퀴 둘러볼 때 도서관 가이드인 아자 에자트는 도서관 집기와 가구를 가리키며 노르웨이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루의 소음을 흡수하는 재질의 참나무는 캐나다, 건물을 지탱하는 검은 대리석은 짐바브웨, 그리고 외벽의 화강암은 이집트 아스완에서 왔다. 더 구체적으로 도서관의 사무실 가구는 스웨덴, 현관의 가구와 집기는 노르웨이 BA 친선협회에서 지원했다. 도서관을 소개하는 안내 책자들은 오스트리아와 그리스 BA 친선협회의 지원으로 발행됐다. 불가리아는 1000점의 자료를 기증했고 그리스는 고대 도서관을 건축한 데미트리우스의 동상을 헌정했다. 기업도 다임러크라이슬러는 메르세데스 버스 2대, 지멘스는 인터넷 카페를 기증했다.
87년 유엔문화과학교육기구(UNESCO)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세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의 지원을 호소한 이래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건립에 동참했다. 총 건립비용 2억2500만달러 중 6500만달러를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오만, 그리고 이슬람 재단인 아가 칸 재단이 냈고 3300만달러는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와 마이크로소프트사 등 27개 국가 및 법인이 부담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처리 교육은 프랑스, 자료 자동 운송기기는 독일, 시청각시설은 일본이 제공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알렉사인터넷이라는 벤처기업을 창립한 브루스터 칼리는 10억 페이지의 인터넷 정보 보관소를 통째로 기증했다.
왜 이처럼 국제사회가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의 호소에 공명했던 것일까. 칼리 사장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1600년 전 사라지기 전 300여년간 존속하면서 인류 문명에 기여한 공로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식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것을 역사상 처음 입증한 세계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BA의 정신을 재현하고 싶다는 열망을 함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5일에도 핀란드 대표단의 도서 기증식이 있었다. 식이 끝난 뒤 만난 타헤르 칼리파 대사(55)는 “미 의회 도서관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도서관들이 BA와의 인터넷 연결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도서관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다. 세계 각지에서 도서나 자료, 자금이 기증되고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의 직함은 국제 담당 대사. 이탈리아 우루과이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한 그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도서관 대외업무의 중요성을 감안해 그를 파견했다.
그는 “국제사회의 반응은 경이적”이라면서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3개 대륙의 교차지점인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의 축복을 받은 도시”라고 말했다.
BA의 부활은 알렉산드리아대의 무스타파 엘 아바디 교수가 71년에 처음 주창했다. BA의 공보국장 타베 엘 바르슈미는 “그때는 이집트의 경제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고 중동의 정세도 불안정했다”고 말했다.
이 제안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유네스코를 통해 국제사회를 움직인 것. 87년 건축디자인 국제 공모에서 노르웨이 설계회사인 스노헤타의 작품이 당선됐다. BA 본관 정면은 지중해를 향해 태양을 빨아들이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회색 화강암인 외벽에는 세계 120개 언어의 알파벳을 새겼다. 한글도 ‘름’과 ‘강’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90년 거대한 댐이 있는 아스완에서 각국의 정상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회의가 열렸다. 바르슈미씨는 “BA 역사의 시작은 바로 이때”라고 말했다. 이날 하루 6500만달러의 기부금이 모였다.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93년 착공에 들어갔으나 땅을 파자 동상 스핑크스 같은 고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알렉산드리아는 어딜 파도 유물이 출토될 정도로 도시 전체가 문화재다. 2년간 110점의 유물을 발굴한 뒤 95년 착공해 7년 만에 완공했다.
칼리파 대사는 “BA의 창립선언에는 BA가 세계로 향하는 이집트의 창이자 이집트로 향하는 세계의 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언대로 도서관의 일상적 운영은 이집트가 담당하지만 정책결정에는 국제적 명망을 지닌 석학 작가 환경운동가 등이 참여하고 있다. BA 친선협회는 세계 20개국에서 결성됐다.
도서관 관장인 이스마일 세라겔딘 박사 자신이 명실상부한 코즈모폴리턴이다. 하버드대 박사 출신의 세라겔딘 박사는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낼 때까지 40권이 넘는 저서를 썼으며 5개 대륙 14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古代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기원전 288년 설립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당대의 학자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연구하는 곳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 점에서 고대 도서관이 그리스 또는 이집트 문화의 소산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다. 지금은 양쪽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양국 모두 자랑스럽게 공통의 역사적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곳이 됐다.
이 도서관에서 연구한 학자로는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 △태양의 운동법칙을 불과 6분30초의 오차로 밝혀낸 천문학의 아버지 히파르코스 △지구의 둘레를 최초로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기하학의 기초를 세운 유클리드 △위대한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도서관학의 아버지 칼리마코스 등이 있다. 히브리어로 돼 있던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곳도 이곳이다.
당시 모두 양피지 70만 두루마리의 자료가 소장돼 있었다. 1 두루마리가 책 160권의 분량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만큼 자료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중해를 지나가는 선박을 멈추게 해 자료를 모두 필사한 뒤 사본을 돌려주고 원본을 도서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로마의 줄리우스 카이사르 황제가 이집트 공략 당시 이집트 함대에 붙인 불이 도서관에 옮아 붙어 건물 일부를 태웠다. 3세기경 로마 군대가 알렉산드리아에 수 차례 침입,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던 궁전을 불태움으로써 도서관은 역사의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도서관이 기여한 문화적 과학적 자산은 인류의 유산으로 남았고 그 기억으로 다시 1600여년 만에 초현대식 도서관으로 살아났다.
타헤르 칼리파 대사는 “동서 문명을 융합해 르네상스의 기초를 다졌던 고대의 도서관처럼 BA는 일방적인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 공영 공존의 지적 보고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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