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년경부터 1533년까지 뛰어난 건축술과 금은 세공 등 서구에 결코 뒤지지 않는 찬란한 문명을 독자적으로 꽃피웠던 잉카 제국에는 문자(文字)가 없었다. 따라서 쿠스코의 과거 상당 부분은 구전으로만 전해져 왔다. 쿠스코는 토착어인 케추아어로 ‘배꼽’이라는 뜻. 고대 잉카인들은 이곳을 지구의 ‘배꼽’, 즉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다.
쿠스코는 고대 잉카문화에 스페인 점령의 유산인 기독교 문명이 결합한 독특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시내 중심의 아르마스 광장 옆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스페인 통치자들이 100년 걸려 지은 대성당은 잉카의 비라코차 신전을 토대로 삼아 그 위에 세워졌다. 은 300t을 녹여 만들었다는 중앙 제단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당시 페루인 화가가 그린 성당 안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잉카시대와 기독교의 상징이 섞여 있다.
쿠스코는 1983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의 평가에 따르면 쿠스코의 문화유산을 가장 위협하는 요인은 급속한 도시화와 지진이다.
지리적으로 환태평양지진대에 있어 크고 작은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1950, 70, 86년에 대지진이 쿠스코를 강타했다. 1970년 지진은 페루 전역에 6만6000여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에드윈 베나베인테 페루 문화청(INC) 역사문화담당 국장(48)은 “1950년 지진 때 대성당의 지붕이 일부 무너지는 등 주요 문화재의 50%가량이 훼손됐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페루 정부는 쿠스코 문화유산 복원 및 보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베나베인테 국장은 “73년부터 100여개의 보존 프로젝트가 진행돼 왔으며 100만달러가 넘는 비용이 투입됐다”고 말했다. 비용 가운데 50%는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가 지원했다. 또 각국에서 200명이 넘는 문화유산 복원 및 보존 전문가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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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프로젝트’=유네스코가 INC, 쿠스코 시청과 함께 지난해 시작한 ‘마라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 쿠스코 근교 마라 마을의 문화유산을 복원 및 보존하는 계획으로 ‘문화유산, 시민, 그리고 지역개발’이라는 구호가 붙어 있다. 유네스코는 이 프로젝트의 자문 역할을 하고 비용은 일본(20만달러)과 미국(2만5000달러) 등이 후원한다.
쿠스코 시내 중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마라 마을은 잉카인들이 농작물을 실험 재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둥근 모양의 계단식 경작지는 고대 잉카인들이 경작에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오랫동안 방치돼 왔다.
주민들이 워낙 가난했던 탓이다. 마을에는 550여가구가 살고 있는데 지난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가구당 하루 수입이 평균 50센트 수준이었다.
유네스코 페루지부 책임자 시로 카라발로 페리키(52)는 “주민들이 워낙 가난해 문화재에 관심을 갖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자체 보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라 프로젝트는 문화유산 보존 프로젝트에 지역개발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사업”이라며 “문화유산 보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적인 선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역개발을 함께 하지 않으면 문화유산 보존은 장기적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 그래서 프로젝트 기획자들은 지역 주민들을 먼저 만나 “당신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을 선발해 문화재 보존 기술을 가르치는 한편 문화유산을 상품화할 수 있는 방법도 교육하고 있다. 잉카시대의 전통기술로 만든 직물 제품, 옥수수 잎으로 바구니 등을 만들어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또 이제는 쓰지 않는 모국어 케추아어를 가르치고 역사 교육도 시켜 관광가이드를 하도록 했다. 주민 100여명이 교육을 받았고 지금 40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1년여 만에 괄목할 만한 효과가 나타났다. 가구당 하루 평균수입이 2달러로 높아진 것. 60가구가량은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기술로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얻고 있다. 주민 전체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돈이 되는’ 문화재를 보존하고 이용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마라 프로젝트는 올해 4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제6회 국제문화유산회의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회의에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캐나다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스페인 미국 핀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베네수엘라 스위스 터키 등 23개국의 문화유산 관련 전문가 215명이 참가했다.
쿠스코=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잉카의 상징 '노란콜라' 페루선 부동의 1위▼
잉카 제국을 파괴한 것도, 잊혀진 잉카문명을 20세기에 부활시킨 것도 모두 페루 토착민이 아닌 백인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532년 황금을 좇아 페루를 찾았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탐욕스러운 정복자였다.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기독교 포교’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실은 잉카제국에 풍부했던 금이 목적이었다.
피사로는 잉카의 황제 아타 후알파를 처형하고 1533년 쿠스코를 정복했다. 잉카제국은 식민지배 300년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정복자들은 잉카의 신전과 궁전을 허물고 그 위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산토도밍고 교회와 산타카타리나 수도원은 각각 태양신전 코리칸차와 태양 처녀의 집 위에 지어졌다. 와이나 카파쿠 궁전 자리엔 라 콤파나 헤수스 교회를 세웠다. 신전과 궁전에 있던 황금은 약탈당했다.
페루의 인종도 완전히 바뀌었다. 백인과 원주민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것.
스페인 계통의 백인은 지금도 페루의 지배계층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이전까지 토착 잉카문명을 의도적으로 폄하해 왔다.
잉카가 20세기에 부활한 것은 상당 부분 미국 고고학자 히럼 빙엄 덕분이다. 1911년 7월 그가 이끄는 탐험대는 안데스의 울창한 산림을 뒤져 쿠스코 북서쪽 114km 지점에서 ‘잉카의 사라진 도시’ 마추픽추를 발견했다.
세계는 이 유적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당시 페루 지식인들 사이에 서서히 형성되고 있던 고대 잉카에 대한 관심을 페루 전체에 폭발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쿠스코는 잉카에 대한 열풍으로 주목받으면서 페루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잉카문명은 다시 페루인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페루 기업이 만드는 ‘잉카 콜라’가 누리는 인기는 페루인들이 얼마나 잉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노랑 빛깔의 잉카 콜라는 1935년 출시돼 곧 바로 콜라 시장을 제패했다. 코카콜라와 펩시는 단 한 번도 잉카 콜라를 이겨보지 못했다. 잉카 콜라가 스페인계 백인 호세 린들리가 1910년 만든 회사의 제품이라는 사실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쿠스코=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잉카제국은…▼
쿠스코는 페루 수도 리마에서 동남쪽으로 580km, 중앙 안데스의 3400m 높이의 분지에 있다. 페루의 관광 중심지이고 인구는 30만명.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구도 계속 늘고 있다.
잉카인들은 문자를 갖지 못했다. 구전돼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1200년경 최초의 잉카 황제 망코 카팍이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여행 중 금으로 된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 지점을 케추아어로 ‘배꼽’, 즉 쿠스코라고 불렀다는 것.
9번째 황제인 파차쿠텍은 영토를 확장해 페루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1493년경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국경까지 영토가 확대됐다. 무리한 영토 확장은 왕정에 내분을 가져와 결국 1533년 스페인에 정복되는 원인이 됐다.
잉카 제국의 정치 사회 구조는 독특했다.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었고, 지배층과 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했다. 중앙집권적 전제정치 구조였으나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벽했기 때문에 잉카를 ‘신권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 제국’으로 부르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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