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왜 이렇게도 많은 노력을 들여 승전 기억을 되살리려 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국내외적 영향력 회복을 위해서다. 최근 민주화 후퇴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 여론과 옛 동맹국들의 잇단 이탈로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린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극적인 반전을 꾀하고 있다.
나치독일에 승리한 화려한 과거를 부각시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여전히 국제질서의 한 축임을 과시하겠다는 의도다. 국내적으로도 승전국의 자부심을 내세워 흐트러진 지도력을 가다듬을 기회로 삼겠다는 것.
그런데 이번 정상회의로 오히려 일부 국가들과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다. 러시아가 이렇게 큰 의미를 두고 있는 만큼 참석을 거부한 국가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기 때문이다.
지난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의회 회기와 겹쳐 현재로선 참석할 의사가 없다”고 밝힌 후 러-일 관계가 경색되고 있다. 가뜩이나 쿠릴열도 4개 섬(북방 4개 섬)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양국 관계가 더 나빠져 푸틴 대통령의 연내 일본 방문마저 불투명해졌다.
에스토니아의 아르놀드 루텔 대통령과 리투아니아의 발다스 아담쿠스 대통령도 “직접 갈 수 없어 총리를 대신 보내겠다”고 통보했으나 러시아는 “국가원수가 아니면 올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렇지만 예외도 있다.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다. 러시아는 이례적으로 북한에 대해서는 초청장에 참석대상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지칭하지 않고 ‘국가를 대표하는 인사’로 표현했다.
해외 방문을 꺼리는 김 위원장 대신 헌법상 국가원수인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대신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다른 정상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어 러시아 외교당국은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8일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을 방문해 ‘승전기념메달’을 받음으로써 불참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 위원장이 이미 직접 불참 의사를 전달하고 푸틴 대통령의 양해를 구한 뒤 행사에 참석할 다른 정상들에 앞서 미리 메달을 수령했다는 분석도 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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