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얄타 서쪽의 리바디야 궁전. 흑해가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언덕에 서 있는 이탈리아풍의 3층짜리 하얀색 건물 벽의 표지판을 보고서야 이곳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7일 얄타협정을 ‘강대국 간의 부당한(unjust) 거래’라고 비난한 이후 얄타는 다시 역사적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정작 리바디야 궁전 안팎을 한가롭게 거니는 관광객들은 이런 논란과는 전혀 관계없이 무심한 표정이었다.
크림 반도의 얄타는 경치와 날씨가 좋기로 유명한 흑해 연안에서도 가장 유명한 휴양지. 제정 러시아의 차르(황제)들은 이곳에 별장을 지었다. 리바디야 궁전 역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여름휴가를 보내던 곳.
따뜻한 얄타에서 회담이 열리게 된 것은 병약한 루스벨트에 대한 스탈린의 배려였다. 회담 기간 중 스탈린과 처칠은 얄타 근교의 다른 숙소에 머무르며 매일 회담장인 리바디야 궁전을 오갔지만 루스벨트는 딸 앤과 이 궁전에서 지냈다. 루스벨트의 취향을 간파한 스탈린은 궁전 1층에 있는 니콜라이 2세의 서재를 푸른색으로 꾸민 후 침실로 내줬다.
환대의 대가였을까? 소련은 미국의 양보로 동유럽의 지배권과 사할린 섬의 귀속 등을 사실상 약속받아 얄타회담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극동문제에 대한 비밀협상은 1층의 대접견실을 개조한 루스벨트의 임시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붉은색 계통의 벽과 카펫으로 꾸며진 방 안의 탁자 위에는 ‘극동문제에 대한 3국 정상의 합의문’을 요약한 사본이 놓여 있었다.
이 회담 내용은 1년 후 얄타비밀협정이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소련군의 대일본전 참전과 전후 일본에 대한 처리 방안 등 모두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안들이었다. 한반도 신탁통치안도 이 방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회담 마지막 날 당구장에서 최종 문서에 서명한 세 정상은 ‘이탈리아 정원’으로 나와 병풍처럼 둘러선 수행원들을 뒤로하고 나란히 앉아 유명한 흑백 기념사진을 찍었다. 2000만 한민족과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국가의 운명이 이 한 장의 흑백 사진에 모두 담겨 있었다.
얄타=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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