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0>칠지도에 담긴 한일교류사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자국 주도로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이전투구를 되풀이하던 4세기, 세 나라 모두 왜(倭)를 끌어들여 군사 원조를 받거나 적어도 상대국에 군사 원조를 못하도록 막으려 노력했다. 김현구 선생 말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당시 왜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왜로서도 한반도와의 교류가 절실했다. 고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선진 문물을 도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는 어찌하여 유독 백제와 가까웠을까. 당시 중국은 남북조 시대였는데 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남조(南朝)와 지리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교류하던 나라가 백제였다. 백제는 왕인 박사를 통해 그리고 남조에서 수입한 최신 문물을 왜에 제공해 일본을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이를 상징하는 유물이 바로 칠지도(七支刀)이다.
○ 복제품도 보기 어려운 칠지도
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375년)이 왜왕에게 주었다는 칼이다. 쇠로 된 긴 몸체에 좌우 여섯 가지가 엇갈려 배열돼 몸체와 함께 모두 7개의 가지를 가진 칼(刀)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몸체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한 외교 문서가 담겨 있다.
일본은 칠지도를 국보로 정하고(1953년) 여간해선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다 올 2월 규슈국립박물관에서 연 ‘고대일본과 백제와의 교류’전에 단 10일간 공개된 적이 있다. 말로만 듣던 진품이 나온다는 소식에 관람객들이 대거 몰렸었다.
도쿄 한국문화원을 통해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를 보고 싶다고 했으나 신궁의 대외 홍보를 맡고 있는 이치무라 겐타(市村建太) 씨는 칠지도 역사에 대한 설명은 해줄 수 있으나 보여주기는 어렵다고 했다. “복제품이라도 좋다”고 지속적으로 청했지만 답이 없었다. 무작정 찾아가기로 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떠나기 이틀 전에야 “신궁에서 참배를 하면 복제품만큼은 보여줄 수 있다”는 답이 왔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나라(奈良) 현 덴리(天理) 시에 있었다. 덴리역에서 택시를 타고 5분가량 산속으로 들어가니 울창한 숲 속에 신궁이 있었다. 6월 초 이곳을 찾았을 때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인지 한적한 시골마을에 풀과 나무 향기가 가득했다.
이 일대는 원래 늪지대였으나 융기된 후 지금의 지형이 돼 아예 신궁 이름을 석상(石上·이소노카미)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궁이다. 3세기 말 일본 최초의 통일 정권인 야마토 정권 때에는 무기고로도 이용됐다.
이곳에서 칠지도가 발견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근대 천황가의 보물창고라는 인식 때문에 숨겨진 보물들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다고 한다. 신궁 안에는 누구도 발을 디뎌서는 안 된다는 ‘금족지(禁足地)’라는 곳이 있었고 여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를 지닌 신기한 창(槍)이 보물상자 안에 모셔져 있는데 이 상자를 여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42년 전인 1873년 어느 날, 신궁의 대궁사(大宮司·신궁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부임한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구석진 창고에서 1500여 년간 봉인돼 있었던 보물상자를 연다. ‘칠지도’가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연 그는 깜짝 놀랐다. 녹이 심하게 슬었지만 녹 사이로 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칠지도를 발견할 당시에 대해 “녹슨 칼에 금빛이 보여 녹을 제거하니 칼 몸체에 금으로 상감된 글자가 보였다”(大和國石上神宮寶庫所藏七支刀·1874년)고 기록했다. 금 상감이란 글자를 예리하게 파낸 뒤 금을 밀어 넣어 새기는 기법이다. 간 마사토모가 계속 칠지도를 닦아내자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가 새겨져 있었다.
○ 액운을 막아주는 신성한 물건
기자가 신궁으로 들어서니 한국에서 연락을 주고받았던 이치무라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배전(拜殿·참배하는 장소)으로 갔다. 가마쿠라 시대의 건축물인 배전은 900년이 넘은 고건축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
배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자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머리를 두 번 조아리니 직원 한 사람이 기자의 머리 위로 하라이우시(발串)라고 불리는 흰 종이를 붙인 나뭇가지를 세 번 흔들었다. 다마구시(玉串)라고 불리는 나뭇가지를 건네받고 제단 위에 뿌리를 앞쪽으로 두고 무릎을 다시 꿇은 뒤 머리를 다시 두 번 조아리고 박수를 쳤더니 참배가 끝났다.
기자가 사무실로 들어서니 잠시 후 직원 2명이 유리 액자에 눕혀 놓은 칠지도 복제품을 내왔다. 신줏단지라도 모시듯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더니 복제품을 받치고 있는 나무 받침대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도 무릎을 꿇고선 일어나지도 않았다.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복제품은 진품과 같이 손잡이를 포함한 전체 길이 74.9cm, 칼 길이는 65cm였다. 얇은 철심에 겉은 플라스틱 수지로 모양을 만든 후 색을 입혔다고 했다. 앞뒤에 새겨진 글자에는 금빛이 돌았다. 이치무라 씨는 “현재 진품은 두 동강 나 있는 상태지만 복제품은 완전체로 복원했다”며 “진품은 복제품과 함께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칠지도는 액운을 막아주는 신의 힘이 깃들어 있어 신성한 물건으로 모시고 있다. 요즘도 매년 1월이 되면 첫 3일인 1∼3일에 소원을 빌기 위해 10만 명이 찾을 정도”라며 “이렇게 훌륭한 물건을 백제가 일본에 보냈다는 것 자체가 한반도와 일본의 오래된 우호관계를 보여줘 한일 교류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유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곳 신궁에서는 칠지도를 신이 내려준 보물이라며 ‘신보(神寶)’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단단했던 백제와 왜의 관계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663년 ‘백강 전투’에서 결정판을 이룬다.
▼ 韓 “하사” vs 日 “헌상” ▼
61글자 해석따라 상하관계 달라져
칠지도가 논쟁적인 유물인 이유는 칼 앞뒷면에 새겨진 총 61개 글자 중 지워진 앞면 8개 글자, 뒷면 5개 글자를 어떻게 유추하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글자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당시 백제와 일본의 상하 관계가 뒤바뀐다. 한국 학자들은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하고 일본 학자들은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학계의 해석에 따르면 칠지도에 새겨진 글귀는 근초고왕의 아들 귀수세자(근구수왕 375∼384년 재위)가 369년 왜왕에게 적군을 물리치라며 하사했다는 뜻이다. 서법도 주는 쪽(백제)이 받는 쪽(왜왕)에 내려주는 명령적 하행 문서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백제와 왜가 동맹관계를 맺은 시기도 근초고왕 재위 때이다. 당시 왜는 오진(應神) 또는 닌토쿠(仁德) 왕의 재위기간이었으며 이때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가 건너가 유학과 여러 문물을 전했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는 “주는 사람은 왕세자(귀수세자)인 반면 받는 사람은 왜왕이므로 백제가 우위인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 중에는 칼을 제작한 귀수세자가 왜와의 동맹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백제가 헌상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어 왜의 군사적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 한일 학계에서는 귀수세자가 왜에 하사했거나 최소한 동등한 관계에서 선물했다고 해석하는 쪽으로 기우는 추세이다. 칠지도가 제작됐을 것이라 추정되는 369년은 백제의 세력이 강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논문 ‘이소노카미(石上) 신궁과 칠지도’에서 “칠지도 글귀는 한일 관계가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학계에서 다르게 해석돼 왔다. 명문 해석이 정치적 상황과 이어지는 것은 칠지도의 숙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이소노카미 신궁 측은 “한반도와 일본의 상하 관계를 가리기보다는 고대의 훌륭한 보물을 어떻게 보전할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귀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학계의 노력도 계속되어야 하지만 칠지도에 담긴 백제와 왜의 우정에 대한 한일 국민들의 관심도 있어야 할 것이다.
:: 신궁 ::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일왕이나 왕실의 조상신 등 격이 높은 신을 모신 신사를 말한다. 이소노카미 신궁은 진무(神武·기원전 711∼585년) 왕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늘에서 도운 영(靈)을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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