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년 백강전투에서 치명적 피해를 입은 왜(倭)는 이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전국적인 방어망을 구축한다. 여기에는 왜로 대거 건너온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도 동참한다.
사실 천신만고 끝에 바다를 건너온 백제 유민들에겐 또다시 건너갈 바다가 없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방어 준비를 한다. 첫 번째 방어가 바로 ‘수성(水城·미즈키)’ 건설이었다.
수성은 규슈 후쿠오카(福岡)에서 내륙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다자이후(大宰府)시에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 덴만구(天滿宮)에서 후쿠오카 쪽으로 가다 보면 상록수와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높은 흙 제방 사이로 도로가 지나가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조금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허허벌판에 왜 이런 제방을 쌓았지” 하며 머리를 한번 갸웃하고 지나갈 따름으로 보인다. 길가에 ‘역사유적 수성’이라는 표지판이 없다면 말이다. 표지판 옆으로는 주차장이 있는데 길 건너편으로 잘려 나간 수성 한쪽 자락 위까지 올라가면 반대편에 있는 수성의 자취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수성은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왜로 대거 건너온 백제 유민들이 눈물을 삼키며 왜인들과 함께 쌓은 성이란 점에서 백제인들의 한이 서린 흔적이라 할 수 있다.
○ 물로 방어한다는 의미의 수성
수성이 있는 다자이후는 바다로 향하는 서쪽만 벌판으로 열려 있고 동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성은 이 서쪽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길이 1.2km, 높이 10m, 하단 폭 77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성을 불과 1년 만에 쌓았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나당연합군의 추격에 공포를 느꼈을지 짐작이 간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바람에 설레는 대나무 숲 사이에서 “적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빨리 성을 쌓으라”고 독려하는 백제 장수의 목 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수성 아래 누런 황토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밤낮으로 흙을 메고 날랐을 백제 유민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으리라.
수성은 얼핏 3∼4세기 건설된 서울의 몽촌토성과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몽촌토성보다 진일보한 기술이 숨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수성의 특이점은 바로 성벽을 꿰뚫고 있는 목통(木桶)이다. 이 목통은 세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평소에 안쪽 해자에 물을 채워두고 바깥 해자는 비워 두고 있다가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 목통을 통해 바깥쪽 해자로 물을 내보내 침공을 막도록 설계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과 왜인들은 숨 가쁘게 성을 쌓았지만, 다행히 나당연합군은 공격의 칼끝을 고구려로 돌렸고 일본으로 건너오진 않았다. 성은 점차 허물어지고, 숲 속에 묻혔다.
수성 외에도 다자이후엔 백제 유민들이 만든 백제식 산성 흔적이 많다. 다자이후 뒷산이기도 한 해발 410m의 대야(大野·오노) 산에 665년 산허리를 따라 8km 정도 성벽이 축성됐다. 같은 시기에 다자이후 남쪽에도 기이성(基肄城)이 만들어졌다. 수성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한 2차 방어선인 셈이다.
일본서기는 이 성들이 망명한 백제 귀족 출신인 달솔 억례복유(億禮福留)와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의 지휘하에 건설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솔은 백제의 16관등 중 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수성 역시 이들의 지휘로 건설됐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왜는 피란 온 백제 고위직 70여 명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백제 유민을 피란민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자리가 많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70여 명이란 수는 상당한 비중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백제의 멸망과 함께 많은 유민들이 왔다는 것, 양국 언어가 소통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오늘날 대야성은 불과 수백 m 구간만 보존돼 있다. 이 수백 m의 성벽이 백제에는 마지막 성이요, 일본엔 최초의 성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일본은 방어를 위해 해자를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대야성 축성 이후 일본 성 건축 기술은 비약적으로 늘어 훗날 성벽과 해자가 결합돼 방어력이 뛰어난 일본 성으로 발전했다.
대야성이 있는 오노 산에 오르면 무연한 벌판 너머 멀리 후쿠오카 시내와 바다가 바라보인다. 1500년 전 고향 땅을 떠난 백제의 어느 병사가 눈을 비비며 매일 바라봤을 그 바다다.
뒤로 돌아서면 905년에 건립된 유명 사찰 ‘덴만구’가 발밑에 보인다.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시는 덴만구는 매년 약 600만 명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인데, 특히 소원을 빌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와 입시철이면 일본 학부모나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 최대 관청이 있던 다자이후
지금의 다자이후 시는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 그늘에 가려진 인구 6만 명 정도의 작은 변두리 도시이지만 율령제하 나라와 헤이안 시대(710∼1185) 내내 일본 서부의 군사 행정 외교 무역 등을 관할하는 특수지방관청이 있었던 중심도시였다.
일본 서부의 9국 3도, 즉 규슈에 있던 9개의 소국(오늘날의 9주)과 쓰시마 이키노시마 다네가시마 등 3도를 다스리는 총독부로서 당시 일본에서 헤이안(교토의 옛날 이름) 다음으로 중요한 행정기관이었다. 현재 시 이름도 그대로 옛날 관청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사실 수성 대야성도 백강전투 이후 다자이후를 앞뒤에서 지키는 방위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후는 또 당나라 신라 등 외교 사절을 맞을 때 의전을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8세기에 들어서 청사 앞에 광장이 만들어졌고 주변에 20여 개 관아가 배치되었으며 학교지구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7세기 말경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다자이후 청사의 위상과 권위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번영기에는 관청 부지만 25만4000m²에 달했다고 하니 현재 한국 여의도 국회의 총부지 면적(33만579m²)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941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해적 반란 때에는 불에 타고 약탈당해 제 모습을 잃었다가 1019년 여진족이 규슈에 쳐들어온 것을 계기로 다시 방어 거점으로 부상했다. 그러다 1192년 일본에 막부 정권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쇠락해 아예 관청이 헐리고 터는 논밭으로 변했다. 일본 정부는 1968년부터 이곳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이후 유적공원으로 지정했다.
기자가 다자이후 관청 터를 방문했던 올해 5월에 넓은 풀밭에서는 종이비행기 동호회 회원들로 보이는 노인 몇 명이 열심히 하늘에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풀밭 가운데 과거 관청 건물 주춧돌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눈길을 끄는 점은 주춧돌들에 바람개비 형상을 한 파형동기(巴形銅器)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파형동기 문양은 천황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욱일승천기가 이 문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러나 1990년 한국 김해시 대성동의 고분에서 일본보다 150년이 앞선 파형동기 9개가 발굴됐다. 천황의 상징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청 터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나온 기와 막새와 도깨비 문양 기와는 한반도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모양이 똑같았다. 다자이후 관청 역시 백제 유민들이 건설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귀신을 쫓고 화재를 막기 위해 붙이는 귀와(鬼瓦)엔 “디자인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 율령국가 ::
율령(律令)을 기본으로 통치한 국가. 율은 형법(刑法)이며 영(令)은 행정조직과 백성의 조세, 노역, 관리의 복무를 규정한 것.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였다는 점에서 토지의 사적소유가 허용된 봉건국가와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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