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재를 통해 취재팀은 일본 땅에 우리가 잊었던 조상들의 흔적이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랐지만, 고대 한일교류사에 정통한 일본인이 많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설계한 독창적 건물로 유명한 ‘지카쓰아스카(近つ飛鳥·가까운 아스카라는 뜻)’ 박물관에서 만난 시라이시 다이치로(白石太一郞·77) 관장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 가야로부터 온 철기문명
그가 갖고 있는 고대 한일 문명 교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보에 대해서도 놀랐지만 일본 주류 학자들 중에는 아직도 고대 한반도로부터의 문화 전수를 감추거나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매우 단호하게 관련 사실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용기 있어 보였다. 4월 17일 오전 10시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예정된 2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됐다.
시라이시 관장은 “일본이 초기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로부터 받은 영향은 절대적이었다”면서 가야에서 왜(倭)로 건너온 철기문명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일본에 철이 처음 들어온 것은 1∼2세기경인데 주로 한반도에서 온 것이다. 6세기까지 일본에선 제철 시설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철을 1차 가공해 다양한 형태로 전환시킬 수 있는 뎃테이(鐵])가 도처에서 발굴된다. 처음엔 가야에서 완제품 형태로 철기를 수입했다가 6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원재료 형태로 수입해 각지로 보낸 뒤 필요한 제품으로 변형해 쓴 것이다.”
그는 이어 “한반도 도래인들이 가져온 문명의 선물은 철에 그치지 않는다. 말과 마구, 한자는 물론 스에키(須惠器)라고 불리는 토기까지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했다.
시라이시 관장은 고고학자답게 유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중에서도 말(馬) 이야기에 기자의 귀가 번쩍했다. 일본 고대 문헌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아직기가 왜왕에게 좋은 말 2필을 선물한 후 말 기르는 일을 맡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라이시 관장은 “당시 왕이 받았던 말은 단순한 선물 차원이 아니었다”고 했다.
“4세기 후반까지 일본엔 말이 없었다. 백제와 국교를 맺으면서 비로소 말을 들여오게 된 것이다. 그전까진 말 유골이 발견되지 않다가 5세기가 되면 말을 순장해 함께 묻는 무덤이 대거 발견되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말이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이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맨 마지막으로 만나는 전시품은 인근 고분에서 발굴된 말의 유골과 한반도에서 건너온 말 모형이다. 시라이시 관장은 4세기 이후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로 대거 유입된 것은 동북아시아 전체 국제정세와 맞물려 있다고 했다.
“4세기가 되면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대거 남하해 남북조시대가 전개되면서 민족대이동이 이뤄진다. 그로 인해 고구려도 남하정책을 펼친다. 신라는 고구려의 철갑 기병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고구려에 머리를 조아리지만 백제는 정면 대결을 택한다. 하지만 자력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해 왜에 동맹을 제의한다. 369년 백제가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가 그 징표라 할 수 있다.”
그는 “5세기 전까지 일본의 갑옷은 보병용 판갑(板甲)이었는데 5세기 후반부터 기병을 위한 비늘 갑옷인 찰갑(札甲)이 등장한다”며 “백제가 고구려 철갑 기병에 맞서기 위한 기병을 대량으로 육성하기 위해 왜에 말을 공급했다”고 했다.
“백제는 왜에 말을 공급하면서 말을 키우고 마구를 만드는 기술자까지 대거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왜는 간토(關東) 지역에 대규모 목장을 조성해 말을 키우고 기병도 육성하기 시작한다.” 그는 “말은 물론이고 스에키(단단한 그릇)와 한자, 불교와 같은 선진 문화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화란 것이 받기만 한다고 저절로 꽃피워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은 한반도로부터 받은 문명을 토대로 자신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다. 철기문화를 흡수해 세계 최강의 일본도(日本刀)를 생산하는 독자적 문화를 만들었듯 말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있으니 바로 그릇이다. 고향(한반도)에선 찬밥 대접을 받던 도자를 국보로 우대하며 세계적인 도자기 문화로 꽃피운 배경에는 이들만의 ‘스에키’ 문화가 있다. ○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토기
일본 고대사 연구자들은 한반도로부터 토기가 전해진 시기를 대략 3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요리에서 찜 요리가 시작된 시기도 한반도에서 ‘시루’가 전래된 이후로 잡고 있다. 나라대 문화재학과 우에노 고소(植野浩三) 교수는 “쌀을 쪄 먹는 토기와 시루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시루와 함께 전래된 토기는 쌍잡이항아리, 바닥이 납작한 사발, 몸체가 긴 장독이다. 대부분 경남 김해시 등 낙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한반도 토기와 똑같다. 빗살이나 새끼줄, 새 발자국(鳥足) 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런 토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무늬가 약간씩 변형돼 갔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처음에는 취사도구를 그대로 가져갔지만, 나중에는 현지인들이 직접 생산했다는 증거”라고 분석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의 조사 결과 4세기까지 한반도 토기는 오사카 만과 강변에 집중 분포한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과 거의 일치한다. 그 후 토기의 출토지는 오사카 만에 흘러드는 강줄기를 따라 일본 본토 내륙 쪽으로 향하고 있어 도래인들의 이동 루트를 보여준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도래인이 갖고 온 것은 부드러운 연질 토기로 일본어로는 하지키(土師器)라고 한다. 이후 하지키는 점차 단단하고 색깔도 다른 경질 토기로 바뀌는데 이것을 스에키라고 부른다.
일본 고고학계는 스에키 생산 시점을 5세기 초반으로 잡고 있다. 스에키를 굽던 사람들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오사카 시 남동쪽 사카이 시(市)에 있는 스에키 대량 생산지 스에무라(陶村)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사카 난바 역에서 전철을 타고 사카이히가시 역에서 내린 뒤 차로 2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공원 안 언덕에 가마터가 나온다. 가마는 길이가 10m 이상으로 아래에는 불을 때는 입구가 보였고 꼭대기 부분은 연기가 빠져 나가는 부분이었다. 도공들이 빚은 토기는 가마 안쪽 아래부터 차곡차곡 계단 모양으로 올려진 뒤 1100도 안팎의 고온에서 구워졌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자료관 측은 ‘스에키는 중국 양쯔 강 남쪽에서 생산됐으며 생산 기술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왔다’고만 밝힐 뿐 생산 주체를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마터 도공들이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것은 1990년대부터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1991년 9월 12일자에서 ‘최고의 스에키 가마터, 사카이 시에서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도래 제1세대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한 바 있다.
스에무라 유적지 일대에서는 한 가마터에서 주거지가 5곳씩 발견됐다. 4인 가구로 계산하면 20명이 한 가마터에서 스에키 생산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가마터가 사카이 시에만 1000곳이 넘었다고 하니 가마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도공과 그 가족이 2만 명이 넘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스에키가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지 못하면 지금의 일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스에키는 도자기에 바통을 넘길 때까지 500여 년 동안 일본인들의 식생활과 문화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공들은 고온으로 재료를 활용하는 기술을 전파하며 야금 기술과 철제 농구의 대량 생산의 길을 터줬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왜 그렇게 한국의 도공들을 끌고 갔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조만간 이어질 도공들의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전할 것이다. :: 하지키(土師器) 스에키(須惠器) ::
가마 없이 500도 안팎에서 구워낸 연질 토기가 하지키다. 스에키는 1100도 이상의 가마에서 구워낸 경질 토기다. 스에키 뒤에 출현한 도자기는 스에키보다 순도가 높은 백토를 쓰고 1200도 이상의 가마를 쓴다. 구운 뒤 유약을 바르는 것도 하지키나 스에키와 다르다.
미나미가와치=권재현 confetti@donga.com / 사카이=정위용 기자
※16회부터는 일본 신사와 사찰에 남겨진 한반도인들의 흔적, 조선도공들과 함께 이룬 일본의 찬란한 도자문화, 그리고 한일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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