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삶에서 신사(神社)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새해 첫날 건강과 재물을 기원할 때에도, 마쓰리(축제) 때에도 신사를 찾는다. 아직도 매년 일본 각료들이 태평양전쟁 전범 신사 참배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신사는 아직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는 저서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에서 “일본 각지에 퍼져 있는 신사들은 12만 곳에 달하며 이 중 8만여 곳이 한반도 이주민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신사들 중 가야와 관련된 것은 가야신사, 백제는 구다라신사, 신라는 시라기신사, 고구려는 고마신사로 불린다. 이 교수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근대화와 새로운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많은 신사와 사찰에 남아 있는 한반도의 흔적을 제거하고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 신사들이 한반도와 관련이 있다는 논의는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지만 역사를 파고들어 가다 보면 한일 간의 진한 교류와 우정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야사카(八坂)신사로 먼저 떠나본다. ○ 일본 신사의 총본사 야사카신사
도쿄 이전 1000여 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중심지는 누가 뭐라 해도 기온(祇園) 거리이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 거리 위로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오간다. 이곳에서 야사카신사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인 히가시야마(東山) 산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왜(倭)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고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의 도약을 시도하는 아스카(飛鳥) 시대인 656년에 지어진 이 신사는 교토에 오는 여행객들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신사 초입으로 들어서니 우리나라 유명 사찰과 다름없는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났다. 다코야키(문어를 넣어 구운 빵), 고구마튀김, 꼬치구이 등 다양한 간식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쭉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경내 일부 건물은 수리 중이어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교토에는 수백 개의 신사가 있다. 아스카 시대를 시작으로 국왕 체제의 중앙집권제가 이뤄진 고대국가 완성기라 할 수 있는 나라(奈良) 시대를 지나 교토가 수도로 정해지는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왕실 문화가 지배하는 중심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의 기틀을 세운 사람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이었다. 교토에 유독 다이샤(大社)라고 불리는 큰 신사들이 많고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 수만 개의 분사(分社)와 말사(末社)가 되었다. 야사카신사는 교토 신사의 총본사(總本社)라고 할 수 있다.
○ 야사카신사의 주인공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야사카’라는 이름 자체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고구려에서 건너온 사신(使臣) 이리지(伊利之)이다. 야사카신사의 유래를 기록한 문헌을 보면 ‘이리지는 왕실로부터 야사카노미야쓰코(八坂造)라는 성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리지는 언제 어떤 경위로 일본에 왔을까.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사이메이 여왕 2년 8월 8일에 고구려에서 대사 달사(達沙)와 부사 이리지 등 모두 81명이 왔다’고 적혀 있다. 당시 고구려가 왜로 보낸 대사절단에 이리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사이메이 여왕이 재위할 당시 고구려는 보장왕, 백제는 의자왕, 신라는 태종무열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니 이리지는 보장왕이 일본에 보낸 사신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 신사를 지키는 신관들도 대대로 이리지의 후손들이 이어 왔다. 올 5월 이곳 신사에서 만난 도조 다카후미(東條貴史) 신관은 “신사 창건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고구려계 도래인들이 세운 것이 거의 확실하다”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신관직을 이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리지는 어떻게 이곳 타국 땅에서 신으로 모셔졌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풀려면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화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신사의 유래를 기록한 문헌에는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신라국의 우두산에 계신 소잔오존(素盞烏尊·스사노오노미코토)을 교토 땅에 모시고 와서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소잔오존’이란 이름은 일본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스사노오’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소잔오존 신은 일본 열도를 만든 창조주 이자나기가 낳은 아들이다. 일본에서는 바다와 폭풍의 신이라고 불린다. 소잔오존은 제멋대로인 성격에 각종 사고를 치다 인간 세상으로 추방됐다. 일본서기는 ‘소잔오존이 인간 땅에 내려온 곳을 신라국(新羅國)의 소시모리(曾尸茂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소시모리는 한국말로 소머리를 의미하는 ‘우두주(牛頭州)’로 풀이돼 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소잔오존을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 교토인의 마음을 지켜준 오중탑
매년 7월 17∼24일 야사카신사가 주관하는 축제인 ‘기온마쓰리(祇園祭)’는 소잔오존을 받드는 축제이다. 이때 교토에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기온마쓰리는 오사카의 덴만마쓰리, 도쿄의 간다마쓰리와 함께 3대 축제로 불린다.
앞서 언급한 교토의 중심거리나 마쓰리 이름 앞에 붙은 ‘기온’에도 사연이 있다. 당초 야사카신사는 기온진자(祇園神社), 기온샤(祇園社), 기온칸신인(祇園感神院) 등으로 불렸지만 1868년 신사와 절을 분리하는 ‘신불분리령’에 의해 지금의 ‘야사카신사’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흥왕 때인 566년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지어지고 황룡사(皇龍寺)도 완성됐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의 기원사에서 ‘기온사’가 유래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고구려계 도래인들의 흔적은 야사카신사에서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야사카 탑’(중요문화재)이라고 불리는 법관사(法觀寺) 오중탑이었다. 법관사는 일본말로 ‘호칸지’라 불리지만 옛날에는 ‘야사카데라’(‘데라’는 사찰을 의미)로 불렸다.
이 오중탑은 신사에서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로 올라가는 언덕길 중간에 있었다.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이라고 한다. 주택가 일반 가옥들 사이에 오중탑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절터도 없고 탑만 남아 있지만 이 오중탑은 교토인들에게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가 쓴 ‘교토’(1962년)라는 책 38∼39쪽을 인용하는 것으로 오중탑을 바라보는 일본 민중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 본다.
‘법관사는 도시와 함께 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고려 이리지의 후예가 창립한 곳이다. 고려의 귀화씨족은 소라쿠 군 가미코마 시모코마 지역을 근거로 해서 고려사를 창건하고 씨족의 거점으로 했지만, 야사카노미야쓰코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지역의 씨족은 이 기온사의 전신인 신사에 제사를 지내고 야사카사(寺)를 지었다. 사원 자체는 유감스럽게도 얼마 안 돼 재해를 당해 쇠망했지만, 무로마치 시대 에이쿄 12년(1140년) 재건된 오중탑이 홀로 서서 동산의 전망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오닌(應仁)·분메이(文明)의 대란으로 교토가 초토화되고 모든 문물이 불타 버리는 전화를 잘도 피하고 살아남은 것이라 감회가 깊다. 그 당시 교토의 낮은 가옥들 중에서 눈에 띄게 치솟은 이 탑은 매일 아침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시민들의 큰 버팀목이 됐을 것이다.’
메이지 무렵까지는 탑 최상층에 전망대가 있어서 교토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 교토를 쟁탈한 군사들이 가장 먼저 탑 위에 휘장을 둘러치는 것으로 교토 지배의 표시를 했다는 설도 있다.
오중탑 뒤로 해가 지고 있었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00여 년 전 이곳에 와 정착했던 조상들도 저런 석양을 마주한 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기온 거리를 빠져나왔다.
:: 고마 ::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구(句)’를 빼고 ‘고려(高麗·고마)’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고려는 ‘고라이’라고 부른다. 사이타마(埼玉) 현 히다카(日高) 시에는 고구려가 망하면서 왜로 건너온 ‘약광’을 시조로 형성된 ‘고마 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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