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잊혀진 백제 왕족… 日서 1500년간 조상신 추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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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8>한일평화대사 곤지왕

① 역사소설 ‘곤지대왕’을 쓴 정재수 작가의 현몽(現夢·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을 바탕으로 김영화 화가가 그린 곤지왕의 상상 초상화. ② 일본 오사카 근교 아스카 촌 주택가에 있는 아스카베신사의 도리이(鳥居·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가로대로 연결한 문). 859년 지어진 신사의 원래 위치에 세워졌다. ③ 교토 근교의 한적한 시골마을 히노 정에 있는 귀실신사 전경. 곤지왕 국제네트워크 제공·아스카=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히노 정=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오사카에 있는 아스카베(飛鳥戶)신사에서는 매년 새해가 되면 막걸리 사과 대추 등을 놓고 술을 한 잔씩 따른 뒤 큰절을 올리는 한국식 제사가 치러진다. 그런데 이들이 모시는 조상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 백제 곤지왕이다.

한국에서 그의 무덤은 확인할 길도 없고 사당조차 없어서 이름조차 낯선 인물이지만 일본인들은 곤지왕을 모신 신사를 짓고 무려 1500여 년 동안 제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한국의 조상신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또 다른 신사가 있으니 교토 근교 시가 현 가모 군에 있는 ‘귀실(鬼室·기시쓰)신사’이다. 우리에겐 잊혀진 백제 조상들을 기리는 두 신사야말로 한일 간의 깊은 인연을 상징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 아스카베신사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아스카 촌은 일본에서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다. ‘아스카 와인’은 일본 와인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신사는 주택가 한가운데 있었다. 지금은 웅장한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이 신사는 한때 일본 왕실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서기 890년에는 제사 비용을 충당하라고 3000평가량의 밭을 하사했을 정도로 특별관리를 받았다. 그만큼 왜(倭) 왕실이 각별히 대우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신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신사에서 모시는 조상신이 백제 곤지왕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유라쿠 일왕 시대에 도래한 백제계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 일족의 조상신인 비조대신(飛鳥大神·백제의 곤지왕)에게 제를 드리는 신사’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카베노미야쓰코’는 왜에 뿌리를 내린 곤지왕 후손들의 씨족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 ‘아스카의 문을 만들었다’는 뜻이니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곤지왕과 후손들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곤지왕은 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무슨 일을 했을까. 잠시 5세기 무렵 백제로 가보자.

5세기 중반 정변을 통해 집권한 개로왕은 귀족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해 왕족 중심의 친위체제를 구축한다. 여기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안보위협까지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살아있는 백제사’의 저자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책에서 “곤지왕은 본래 왜에 군사를 청하는 청병사 자격으로 파견됐지만 당시만 해도 이미 왜에 경제적 기반을 갖춘 백제 귀족들이 있어서 이들을 관리하는 한편 왕권 강화 차원에서 왜와의 교역 독점 창구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461년 왜로 건너간 곤지왕은 한성이 함락(475년)될 때에도 귀국하지 않고 있다가 477년에야 백제로 돌아간다. 귀국 후 왕실 출납을 담당하는 내신좌평에 임용됐으나 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를 조상신으로 모신 아스카베신사가 있는 아스카 일대는 곤지왕이 왜에 있을 때 머물던 곳으로 고대 사료를 분석한 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이 일대 주민의 36%가 한국계였고 그중에서도 백제계가 64%나 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한때 없어졌던 신사를 다시 만든 주역이다. 1908년 메이지 정부는 신사 통폐합을 한다며 이 신사를 다른 신사와 합쳐 버렸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1950년대 신사부활운동을 시작한다.

마침내 1952년 신사의 문을 다시 열게 되자 정부로부터 일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고 주민 헌금으로만 운영하기로 결정한다. 신사 관리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맡고 있었다.

운영 총괄책임을 맡고 있는 6인회의 멤버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요지(仲村要司·69) 씨는 기자에게 “내 부친은 내 이름을 신사부활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일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따 지을 정도로 곤지왕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나 역시 곤지왕을 생각할수록 1500여 년 세월로 맺어진 한일 인연의 신비함을 느끼게 된다”며 “매년 10월 17, 18일 이곳 신사에서는 곤지왕을 추모하는 마쓰리(축제)를 열고 있는데 소식을 듣고 찾아온 한국인들이 ‘우리도 잊고 있던 백제 왕자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모셔주고 있다니 정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 귀실신사

교토에 있는 귀실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신사는 시내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시가 현 가모 군에 있는 작은 마을 히노(日野) 정에 있다. 단청 무늬가 있는 팔각 기와지붕의 귀실신사 입구는 한눈에도 한국 정자(亭子)와 유사했다. 일본 신사의 지붕은 보통 나무껍질로 덮여 있다. 귀실신사 앞 안내판에는 ‘백제 도래인 귀실집사(鬼室集斯)를 모시는 신사’라는 설명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귀실집사의 묘 앞에는 ‘귀실집사지묘(鬼室集斯之墓)’라는 비석까지 서 있었다.

귀실집사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는 귀실집사가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패하기 1년 전인 662년 백제유민 700명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한 뒤 26년 동안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왜왕 덴지(天智·재위 661∼671년)는 그에게 소금하(小錦下)라는 벼슬을 주었고 그와 함께 온 유민들을 이곳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정착한 백제 망명자는 모두 1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신사 뒤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는 아직도 후손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

귀실집사는 학식이 뛰어나 671년에는 교육부 장관 격인 ‘학식두(學識頭)’에까지 임명된다. 그의 부친은 백제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왕의 사촌 부여복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여복신은 나당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이 커 귀신을 놀라게 했을 정도라고 해서 ‘귀실’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한다.

귀실신사도 아스카베신사처럼 일본인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스카베신사처럼 신관을 따로 두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신앙 의례까지 주관하고 있었으며 관리비는 주민들이 매달 내는 1500엔(약 1만3500원)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었다.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고 있었다.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살고 있다는 사이토 기요지(齊藤淸治·74) 씨는 2013년 임기 4년의 주민 대표가 됐다. “직접적인 조상도 아닌데 기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일본에는 수많은 신사들이 있다. 하지만 신사 내 묘비에 특정인의 이름, 사망 연도, 생전 직책 등이 다 표시된 곳은 거의 없다. 귀실집사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1316년이나 되는 긴 역사를 가진 신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 이렇게 신사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자부심을 느낀다.”

기자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주민들의 철저하고 꼼꼼한 자료 정리 및 문서 보관이었다. 사이토 씨는 1940년에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방명록 20권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무려 75년간 매년 신사를 찾은 7만5000여 명의 이름과 소감이 기록되어 있었다.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필체도 보였다.

주민들은 귀실집사의 부친 귀실복신을 추모하는 은산별신제를 주관하고 있는 충남 부여군 은산면과도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은산별신제의 유래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은산 지역에 원인 모를 괴질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이상하게 생각한 주민들이 점을 쳐 보았더니 백제 멸망 때 죽은 병사들의 원혼이 떠돌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온 것. 마을 사람들이 백제군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씻김굿을 지내주자 괴질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은산 주민들은 백제군의 원혼을 달래고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풍요를 비는 별신제(국가 중요무형문화재 9호)를 매년 2월 지내고 있다. 주민 우에다 요시카즈 씨(65)는 “귀실신사는 한일교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며 “백제 유민들이 일본 수도와 가까운 곳에 집단 군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이들의 정착을 왜왕이 직접 주선하고 고위 관직에 임명했다는 점만 봐도 당시 한국과 일본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곤지왕 ::

이번 시리즈 6회 ‘왜(倭)에서 태어난 무령왕’ 편에서 언급됐던 인물.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무령왕을 임신하고 있었던 형수와 함께 왜에 가던 중 형수가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을 낳자 모자(母子)만 돌려보낸 뒤 자신은 왜에 남는다.

아스카=권재현 confetti@donga.com / 히노 정=하정민 기자

※19회 ‘백제의 테크노크라트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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