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완성한 시대를 ‘아스카 시대’(550∼710년)라 부른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이다. ‘아스카’라는 말은 당시 왜의 권력을 잡고 있던 야마토 정권의 주 무대 ‘아스카(飛鳥)’ 지역 이름을 딴 것이다. 현재 나라와 오사카 일대에 걸쳐 있다.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한 결정적 계기는 백제로부터의 문화 전수였다. 4세기경 ‘칠지도’(시리즈 10회에서 자세히 소개)를 보내며 왜와 첫 공식 교섭을 했던 백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6세기 성왕 대에 이르러서는 왜와 전방위 분야에 걸친 왕성한 교류를 한다.
대규모 문화 사절단이 수시로 백마강 변 구두렛 나루에서 왜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는 기록들이 나오는데 이 구두렛 나루가 백제를 칭하는 일본말 ‘구다라’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왜로 가는 배에는 사찰 건축 기술자들을 포함해 재봉사, 방직공에서부터 오경박사 같은 학자들까지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흔적들은 정작 우리에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고 일본에 많이 있다. 오늘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오미아시(於美阿志)신사
나라 현 아스카 히노쿠마 마을에 있는 오미아시신사는 방직, 토목공사, 수리공사 등에 기여한 백제인들을 기리는 곳이다.
4월 15일 오후에 찾은 신사는 주택가 마을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시골에 있는 신사치고는 제법 규모도 있었고 품격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매우 쓸쓸했다. 상주하는 신관들도 없어 버려진 곳처럼 보였다.
신사 앞에는 아스카 보존회가 세워놓은 녹이 슨 동판 안내판이 서 있었다. 여기에 신사의 역사가 간략히 나와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미아시신사가 있는 장소는 옛날 히노쿠마지(檜외寺)라는 절이 있던 절터였다. 히노쿠마는 백제에서 온 아지사주(阿智使主)가 살았던 곳이라 전하는데 이곳 신사는 그를 제신(祭神)으로 섬기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오미아시신사의 제신 ‘아지사주’는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백제인으로 ‘일본서기’(720년)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서기에 따르면 아지사주는 409년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와 함께 17현의 무리를 이끌고 건너왔으며 부자(父子)는 모두 왜에 귀화해 새로운 씨족인 ‘야마토노아야(東漢)씨’를 이뤘다고 적고 있다.
아지사주 부자는 어떤 경위로 왜로 건너왔을까. 그가 건너온 시기는 백제 전지왕(405∼420년 재위) 때이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잇따른 침공에 연전연패한 데다 큰 가뭄과 왕위 쟁탈전으로 정정(政情)이 매우 불안해 나라 전체가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이 시기 많은 백제 백성들이 신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일본행을 택한 사람들도 상당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지사주 부자 일행도 이때 건너와 아스카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일행은 주로 도공, 화공, 마구 및 비단 제작자였다고 한다. 또 대규모 관개사업, 토목공사, 농지개간 기술 등을 가진 수준 높은 기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아지사주 부자 일행은 아스카 일대를 중심으로 머물면서 왜인들에게 각종 기술을 전수한 ‘테크노크라트’였던 셈이다.
한반도 도래인들의 흔적은 오미아시신사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유적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사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가면 나오는 그 유명한 ‘다카마쓰(高松) 고분’이다. 일본 국보인 이 옛 무덤은 1972년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가 이 일대를 조사하다 발견한 것이다. 일본 유물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고분 벽화가 부장품들과 대거 쏟아져 나와 일본 사회는 ‘전후(戰後)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며 발칵 뒤집어졌었다.
고고학자, 역사학자는 물론이고 미술사학자, 천문학자들까지 총동원되어 조사한 결과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이 40∼60세 정도의 성인 남자이고 이 인물은 유물로 볼 때 고귀한 신분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당초 천황릉으로 추정되었던 고분이 양식 면에서 횡혈식 석실 고분으로 한반도 무덤 양식이었던 데다 무덤 안 벽화들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신도, 별자리 그림,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그림이어서 다시 한 번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다. 백제 아지사주 부자 일행이 살던 아스카 히노쿠마의 오미아시신사 일대가 백제 도래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카마쓰 고분 주인이 한반도계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동북아재단 연민수 역사연구실장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 멸망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왜로 집단 망명하는데 이때 온 고구려 망명 왕족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
○ 패션을 선도한 백제인들
고대국가로 발전한다는 것은 정치체계의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말이다.
5세기 전까지 고대 일본엔 변변한 의복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중국에서 나온 6세기 초 각국 사신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보면 일본인 사신들은 가죽과 천을 여민 옷을 걸친 초라한 행색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이를 근거로 전문가들은 당시 일본인들의 의복문화를 ‘겨우 몸을 가리는’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옷감을 짜는 기술과 재봉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에 옷감 짜는 기술과 복식문화를 전파한 사람들이 바로 백제인들이었다.
아스카의 구레쓰히코신사는 백제에서 건너간 재봉 기술자 부부를 모시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손재주가 있는 자(者)인 한직, 오직과 바느질을 담당하는 자매를 데려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당시 아스카 일대에는 백제인 재봉사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일본 왕실 사료에서 나온 복식이 백제 복식과 상당 부분 비슷해 백제 옷이 왕실 패션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김병미 공주대 교수의 ‘백제옷의 직물과 문양’에 따르면 “일본 유랴쿠(雄略) 천황 때(463년) 백제에서 건너온 직인이 비단으로 옷을 짜는 기술을 전파하면서 한국식 비단(韓錦)이 일본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백제 복식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들도 인정한다. 복식학자 나가시마 노부코(永島信子) 씨는 1937년 펴낸 ‘일본 의복사’에서 “백제인들이 옷깃을 여미는 재봉 법을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2005년엔 고고학적으로 입증할 유적까지 나왔다.
올 5월 14일 찾은 오사카 부 히라가타 시 인근 나스즈쿠리(茄子作) 유적. 2005년 이곳에선 5세기 때 쓰이던 베틀이 발견됐는데 실 자국까지 선명한 백제식이었다. 히라가타 시 측은 “일본서기에 5세기 초반 백제 재봉사가 일본 왕실에 건너왔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발굴된 베틀과 시기가 일치한다”고 밝혔다.
주거형태도 백제인들의 영향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맞았다. 그전까지 움집과 비슷한 형태의 집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5세기 이후 도랑을 판 뒤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운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기둥 사이를 흙벽으로 메운 뒤 지붕을 얹어놓은 식이다. 나라 현의 가시하라 시에서 이런 형태의 집터가 처음 발견됐는데 1990년대 중반 한국 공주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집터가 발견되면서 백제식 주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 교수는 “백제인들의 일본 도래는 일본 문화와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며 “백제인과 백제 문화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오지 않았다면 일본 고대 문화는 적어도 100년 이상 뒤졌을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 아스카 ::
일본에서는 ‘아스카’라고 발음하는 지명이 많은데 ‘明日香(명일향)’ ‘安宿(안숙)’ ‘飛鳥(비조)’라고 쓰는 아스카는 모두 한반도 도래인들과 관련이 있다. 특히 ‘安宿’은 ‘도래인들이 편안하게 잠드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실제로 산천이 충남 부여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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