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라(奈良) 현 이카루가(斑鳩) 정에 위치한 호류(法隆)사는 우리 귀에도 익숙한 사찰이다.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 때문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소설가 정한숙의 ‘금당벽화’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소설 속 담징은 수나라와 전쟁 중인 조국을 걱정하다가 승전(勝戰) 소식을 듣고 벽화를 그린다. 작가는 담징이 완성한 관음상 벽화를 묘사하면서 다음처럼 한 편의 시와 같은 문장을 남겼다.
‘거침없는 선이여, 그 위엔 고구려 남아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는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 땅에 남아 있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런가.’
○ 위대한 백제계 불상조각가 도리(止利)
담징의 그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봄비가 내리던 4월 14일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경주 불국사에 온 듯 경내가 낯설지 않았다. 드디어 금당 안. 그런데 안타깝게도 금당에는 아예 벽화 자체가 없었다. 1949년 1월 화재로 손상되어 부랴부랴 수장고로 옮겨놓고 절의 박물관 격인 대보장전(大寶藏殿)에 모사화로 전시해 놨다는 것이다. 대보장전은 조금 있다가 들르기로 하고 금당 중앙으로 눈길을 돌렸더니 청동석가삼존상(일본 국보)이 들어왔다.
670년 불탄 것을 710년경 재건한 호류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란 타이틀을 자랑하는 일본 불교 사찰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절을 지은 사람은 백제계 후손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불교 전쟁을 승리로 이끈 쇼토쿠(聖德·574∼622) 태자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자세히 소개된다.
호류사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190종 2300여 점에 이르는 국보 및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보물창고이다. 금당 안에 모셔진 청동석가삼존상은 이 보물들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삼존상(광배·光背 중앙에 독립된 입상을 세우고 좌우에 보살을 세운 불상) 얼굴을 자세히 보니 길쭉한 얼굴과 우뚝한 콧날, 살짝 눈을 감은 모습이 22회에서 소개한 아스카 대불과 닮았다. 만든 사람이 같기 때문이었다. 바로 도리 불사(佛師·불상 제작자)이다. 일본 사찰에서 도리 불사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불상은 둘인데 아스카사 대불과 호류사 청동석가삼존상이다. 삼존상에는 광배 뒷면에 14행에 달하는 긴 문장으로 제작 연도, 제작 동기, 제작자 이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문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22년 쇼토쿠 태자가 병에 걸리고 태자비까지 눕게 되자 도리 불사에게 석가상을 조성하게 하여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원했으나 태자 부부는 세상을 떠났고 삼존상은 623년 3월 완성되었다.’
이 기록에는 도리 불사의 이름이 ‘구라쓰쿠리쿠비도리(鞍作首止利)’로 되어 있다. 구라쓰쿠리(鞍作)는 말안장 같은 마구 제작을 담당한 기술자 집단의 성씨(시나베·品部)를 뜻하며 구비(首)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이다. 도리의 할아버지 이름은 사마달, 아버지는 사마다수나인데 사마(司馬)는 ‘말을 다루는 관직’을 뜻한다. 지난 회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했지만 백제는 일본에 말과 마구 제작 기술을 처음 전해준 나라이다.
도리의 할아버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아버지 역시 요메이(用命)왕이 병으로 쓰러지자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승려가 되어 불상 제작자가 됐을 정도였다. 도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일본 미술사에서 ‘도리 스타일’이라는 독창적 조각 양식을 구축하는 명장이 된다.
○ 일본 성인(聖人)의 스승 혜자
호류사에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인들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금당을 나와 대보장전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성령원(聖靈院)’이란 건물에서 만난 혜자(惠慈) 스님이 대표적이다.
성령원에 모신 영(靈)은 일본인들에게 성자로 추앙받는 쇼토쿠 태자인데 혜자 스님 조각상이 태자 옆에 그의 세 아들과 서 있을 정도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생전에 태자와 스님의 인연이 얼마나 깊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 역사서들은 혜자 스님이 594년 일본에 와 태자에게 불법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2년 뒤인 596년에 일본 최초 사찰 아스카사가 지어지자 백제 혜총(惠聰) 스님과 함께 이 절에 살면서 일본인들에게 불법을 전했다. 그리고 일본에 온 지 21년 만인 615년 고구려로 돌아간다.
혜자 스님은 당시 일본의 국사(國師)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서기는 혜자 스님이 고구려로 돌아가고 7년째 되던 해인 622년 쇼토쿠 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하며 자신도 이듬해 같은 날에 죽어 정토에서 태자를 만나겠다고 부처님께 빌었으며 이 말대로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호류사에선 매년 음력 2월 5일 쇼토쿠 태자 기일에 스님 제사를 함께 치른다고 한다. 민족과 국경을 넘어 스승과 제자라는 인연으로 만나 영혼까지 함께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 인연이 얼마나 깊고 심오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 ‘구다라 관음상’
대보장전에서 단연 시선을 끄는 유물은 목조불상 ‘백제관음상’(일본 국보)이다. 불상은 2m가 넘는(209cm) 키에 늘씬한 8등신 몸매 때문에 실제보다 더 커 보였다.
말로만 듣던 백제관음상을 실물로 보니 그동안 수많은 일본 문인(文人)들이 불상을 찬미하는 글을 숱하게 남겼다는 게 수긍이 갔다. 물에 젖은 듯 착 달라붙는 천의(天衣) 아래로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 있고 목이 긴 물병을 들고 있는 불상과 불꽃을 형상화한 듯한 광배는 물과 불의 만남을 형상화한 듯한 신비한 매력을 뿜어냈다.
불상 이름에 백제(구다라)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안내문을 읽어보면 “본래 다른 절에 있다가 옮겨온 것”으로 “일반에게 구다라 불상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만 적혀 있었다.
하지만 홍윤기 교토 리쓰메이칸(立命館)대 초빙교수는 불상이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1648년에 간행된 호류사 불상들의 기록을 정리한 ‘제당불체수량기 금당지내(諸堂佛體數量記 金堂之內)’라는 기록물에서 “백제관음상은 백제국으로부터 도래(渡來)했다”는 기록을 찾아내 공개한 것이다. 김현구 전 고려대 교수도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라는 책에서 일본 미술사학자이자 건축가 세키노 다다시의 말을 인용하면서 “백제관음상은 조선에서 고도로 발달한 수법으로 백제 예술의 최고 걸작”이라고 전한다.
○ 금당벽화에 얽힌 전설
드디어 대보장전 마지막 전시물이자 담징이 그렸다고 알려진 금당벽화 12폭 앞에 섰다. 본래 동서남북 벽면에 각각 붙어 있던 4개의 극락정토도와 8개의 보살 그림을 병풍처럼 늘어놓았다. 벽화 속 보살들의 곡선미 넘치는 풍만한 몸매와 나른한 눈동자, 치렁치렁한 의상과 액세서리, 은은한 색채는 불화(佛畵)에 문외한도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 그림은 모사화였다. 1968년 일본의 내로라하는 회화 거장 14명이 1년여간 달라붙어 화재로 훼손된 원작을 복원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섬세하게 복원을 해 놓았는지 모사화라고 해서 감동이 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그림의 원작을 담징이 그렸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현재의 금당벽화는 710년 사찰이 재건될 때 조성된 것인데 담징은 그보다 103년 전인 607년 원래 건물이 지어질 무렵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학계는 호류사 금당벽화가 담징의 작품이 아닐 것이라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서기(720년)에는 담징이 610년 일본으로 건너와 불법을 강론하고 종이와 먹, 연자방아 제조법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담징은 일본에서 종이와 먹의 시조로 불린다.
비록 호류사 금당벽화를 담징이 직접 그렸다고는 볼 수 없어도 아예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04년 호류사 남문 쪽 옛 절터에서 불에 타 색깔이 변한 60여 점의 벽화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 파편들이 원래 1차 건축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원건물 금당에도 벽화가 존재했으며 백제계 또는 담징 같은 고구려계 화공들의 작품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록 호류사 금당벽화의 작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대 한일 화공(畵工)들의 협업이었으리라는 추정이 단지 설(說)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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