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부패문화를 바꾸자- 변질된 「부조금」

  • 입력 1999년 3월 17일 19시 31분


《부조(扶助)란 쌈짓돈을 품앗이해서 혼주나 상주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조상들은 달걀 한 줄, 쌀 한 되라도 보태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형편이 안되면 상가(喪家)에서 곡이라도 길게 뽑아 ‘곡(哭)부조’라도 할 만큼 인간의 도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경조사가 집안의 세(勢)를 과시하고 체면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여겨지게 됐다. 오죽하면 ‘정승이 죽으면 안가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간다’는 속담이 생겨났을까. 오늘날 힘있는 이들의 경조사는 ‘뇌물 접수창구’역할을 하기도 한다. 힘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청첩장과 부음을 남발, 약자의 허리를 휘게 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 부조문화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본다.》

“아따! 사람 좀 봐라. 과연 실세는 실세구먼.”

길게 줄을 늘어선 부조행렬 사이에서 간간이 이런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여당의 실세 의원이 딸을 출가시킨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공항터미널 예식장. 축의금 접수대앞에는 하객들이 30여m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접수대에 앉은 비서진 등 4명이 두 손으로 번갈아가며 봉투를 받을 정도로 하객이 끊이지 않았다. 예식이 끝날 무렵 어깨에 메는 스포츠가방 2개와 007가방 부피의 2배 정도되는 큰 손가방 1개에 축의금 봉투가 가득 찼다.

그러나 예식장측 관계자는 “지난 정권때 여당 의원들에 비하면 하객 수나 봉투 규모가 상당히 줄어든 것”이라고 귀띔했다.

정재계 유력인사 자녀의 결혼식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서울 삼성동 공항터미널과 영등포구 여의도 63빌딩의 코스모스홀에선 하객이 구름처럼 몰리는 초호화 결혼식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변 도로는 그때마다 하객이 타고온 자동차로 극심한 교통 혼잡을 빚는다. 지난해 말 여의도 한 교회에서 열린 여당 핵심인사의 아들 결혼식때는 교회앞 왕복 6차로 도로 중 4개 차로가 하객의 자동차로 꽉 메워져 이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이는 하객의 숫자나 부조금의 규모로 경조사를 치른 집안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를 평가하곤 하는 우리의 의식 때문.

‘높으신 분’들의 경조사는 이처럼 ‘뇌물’ 또는 ‘보험금’의 전달통로로 변질된지 오래다. 정관계 실세의 경조사는 부담없이 정치자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자연히 부조금액도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99년도 공직자 재산변동 공개내용을 보면 경조사비를 재산증가 사유로 신고한 공직자가 13명이었다. P장관은 유가증권 매입과 축의금 등으로 2억원, L대사는 축의금과 계좌이체 등으로 3억1천만원이 증가했다고 신고했다.액수는 어느 정도인가수년전 정계 실력자 L의원의 딸 결혼식때 재벌 총수들이 낸 부조금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1천만원씩이었다. 2천만∼3천만원을 낸 지역구 기업인도 몇몇 있었다. 부조금 총액은 4억원이 넘었다.

지난해 한 ‘힘있는 기관’ 간부의 상가를 찾은 은행장과 대기업사장 등은 은행에서 갓 찾은 신권 1백만원씩을 봉투에 담아왔다. 이 간부의 한 측근은 “하루 접수분만 1억원을 넘었다”고 귀띔했다.

96년 10월 뇌물수수 혐의로 경찰에 소환된 모 지방시장의 아들 결혼식때는 축의금만 1억7천만원이 들어온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마당발’로 손꼽히는 모 인사의 경우 자녀 결혼식에 10억원대의 축의금이 들어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떠돈다. 정가에서는 중진급 이상 정치인의 경조사 수입이 수억원대에 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해 말 여당 J의원 모친상에서는 수표와 현금으로 쇼핑백 3,4개를 가득 채웠다. 한 측근은 “다른 정치인의 경우도 대략 이 정도는 된다”고 말했다. 은행관계자들은 “힘있는 분들이 경조사를 마친 뒤 계좌추적이나 세금추적 등을 우려, 친인척 명의로 분산예치하거나 시간을 두고 입금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부조금 고지서‘물좋은 자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경조사를 한밑천 챙기는 기회로 삼는 예가 드물지 않다. 본래의 취지를 벗어난 부조풍토는 지위 고하를 막론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곳에 청첩장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기업 계열사의 한 경리담당자는 “관할 세무서와 경찰서, 소방서 등의 직원 경조사를 챙기는 것이 중요한 업무중 하나”라며 “관에서 직간접적으로 경조사를 알려오고 괘씸죄에 걸리지 않기 위해 거르지 않고 부조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시내 노른자위로 꼽히는 경찰서 정보과 형사의 아들 결혼식때 관내 업소 주인들이 식장에 모두 참석하는 바람에 주말 상가가 텅 비었다는 일화도 있다. 청첩장이나 부음이 ‘세금 고지서’로 인식된 지는 오래다. 퇴직한 한 세무공무원은 “세무서에는 ‘총각이 결혼하려면 법인세과에 근무할 때 하라’는 말이 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법인세과 9급 공무원도 2백∼3백개 업체를 담당하고 있어 엄청난 부조금이 들어온다”고 말했다.문제점과 개선책경조사 비용을 품앗이한다는 미풍양속으로서의 상호부조가 권력과의 ‘잘못된 만남’으로 사실상 ‘뇌물’이나 ‘보험금’의 통로로 변질된 상태다. 거액의 부조금이 오가는 이같은 풍토는 ‘뇌물수수’에 대한 도덕적인 무감각 현상을 불러오고 사회적 위화감을 조장하며 서민들을 짜증나게 한다.

건국대 허만형(許萬亨·사회복지)교수는 “국민의 의식개혁만이 잘못된 부조문화를 바로잡는 길이지만 무엇보다 사회 지도층부터 절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세청은 최근 현역 국회의원의 딸이 받은 1억여원의 결혼축의금에 대해 “하객들이 아버지를 보고 축의금을 낸 것”이라며 증여세를 부과한 바 있다.

<특별취재팀 / 팀장 오명철 사회부차장 이병기 이철희 박현진 윤종구 부형권기자>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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