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부패고리 왜 안끊기나…뿌리깊은 「뒷돈문화」

  • 입력 1999년 3월 31일 19시 25분


《‘서정쇄신’ ‘부패척결’ ‘중단없는 사정’…. 구호만 조금씩 달랐을 뿐 각 정권은 집권초기 부패척결을 소리높이 외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순간의 ‘칼바람’이 지나가면 곧 하루가 멀다하고 공무원의 비리보도가 줄을 잇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제는 국민이 웬만한 공무원의 부정부패 사건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민간부패 역시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민(民)이나 관(官)이나 하나도 다를바 없다. “한국에서 부정부패 척결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자조까지 나오고 있다. 부패의 고리는 왜 이토록 끈질긴 것인가. 전문가들은 부패가 워낙 만연돼 있어 뇌물이나 촌지가 ‘비정규 소득’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부패척결과 공직자 사정을 폈으나 부패행위는 그때만 수그러들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관성처럼.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과천청사의 한 중간 간부는 “IMF체제이후 월급 외에 돈없이 살기 어렵다는 걸 절감했다. 조직운영이나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많고 무엇보다 의욕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맑은 사회 운동’을 펴고 있는 본보 클린21은 제1부 ‘부패문화’에 이어 제2부 ‘부패 고리 왜 안끊기나’를 진단한다.》

■왜 ‘뇌물 중독증’에 빠지나

공직생활 25년째인 행정부처의 모국장.

그는 김대중정부 들어 뇌물과 관련해 나름대로의 원칙을 정했다.

액수가 커서 뒤탈이 나지 않을 정도의 액수만 받아서 쓴다는 것이다.

그는 뇌물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생계형 부정공무원’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25년 공직생활의 ‘관성’ 때문에 돈을 받는다.

실제로 이런 돈을 조달하지 못하면 부하직원의 식사비나 회식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중앙부처 국장으로서의 ‘품위유지’를 위해서도 적잖은 ‘용돈’이 필요하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한번에 엄청난 액수를 챙기는 고위 공직자의 경우지 푼돈 정도를 받는 것은 문제가 될 것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른바 그의 ‘촌지론’이다.

최근 일선 세무서 계장으로 퇴직한 J씨. 그는 재직시 ‘적극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업자들이 알아서 주는 돈은 사양하지 않았던’ 경우다.

그가 ‘뇌물은 마약처럼 중독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 것은 문민정부초기 사정바람이 휘몰아 칠때였다.

용돈은 자체조달해오고 가끔 집에 ‘월급 외 목돈’까지 갖다주던 그가 사정한파에 6개월을 버티다 보니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식사비나 용돈을 월급에서 타 쓰다 보니 생활비가 50만원 이상 깎이게 되고 과거의 습관대로 생활하다 보니 결국 부인 몰래 가계대출 1천만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뇌물과 접대에 익숙한 생활습관을 완전 청산하기 어려웠던 그는 결국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평소 용돈정도로 생각했던 뇌물이 자신의 생활에 얼마나 뿌리깊이 박여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는 것.

많은 공직자나 회사원들이 부패한 생활양식에 익숙해지면 그 생활을 버릴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익숙해진 쾌락적인 소비행태는 ‘충격요법’이 없는한 바꾸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무원 부패는 길들여진다

처음부터 부패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공무원은 없다. 또 뒷돈을 챙기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회사원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부패의 구조에 합류하게 되는 것일까.

대전대 법학과 김용세(金容世)교수는 “사회전반에 부패가 만연돼 있을 경우 신입 조직원은 직장상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패문화에 길들여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김교수는 특정인이 부패문화에 길들여지게 되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①부정한 돈인 줄 알지만 직장 상사가 주는 돈을 ‘상사가 주는 돈이니까’하며 받는다.

②월급 외의 돈에 익숙해져 생활 및 소비습관이 이에 맞춰진다.

③본인 스스로 죄책감을 덜기 위해 뇌물을 ‘관행’이니 ‘마음의 정’이니 하며 합리화한다.

④본인이 직접 돈을 받는다.

⑤주지 않으면 돈을 달라고 직접 요구해서 받는다.

30대초반에 경찰 초급간부가 된 L씨의 고백.

L씨는 경찰 입문초기에는 ‘어떤 상황하에서도 돈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기동대중대장을 하면서 공식 판공비(한달 20만원)만으로는 도저히 1백명이 넘는 부하들을 거느릴 수 없어 부하직원이 갖다 준 돈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지방 경찰서의 과장을 맡은 뒤부터는 스스럼없이 부하들이 갖다 주는 돈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눈먼 돈’을 받는 것이 조직에서 모가 나지 않게 살 수 있는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재 서울에서 내근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이제 민원인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을 정도가 됐다. 받은 돈은 부하 직원들 밥도 사주고 개인용도로 쓴다.

그는 “뇌물을 받아 치부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뇌물이 없으면 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의 이런 변화는 마치 영화 ‘투캅스’를 보는 느낌이다. 이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대부분의 경찰이 자신들의 얘기로 실감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부패 이렇게 뿌리뽑아라

전문가들은 강력한 법집행과 고위공직자 및 정치인 비리를 전담 수사하는 사정기관 신설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래야만 중하위직 공무원들이 “지금의 소비수준을 지속해 나가다가는 파면되거나 구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생활태도를 고쳐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연구원 김영평(金榮枰)원장은 “강력한 법집행이라는 한가지 치유책만으로 부패를 뿌리 뽑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행정규제 완화를 통한 공무원의 영향력 감소,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 확보, 내부 고발자 보호를 위한 자율규제 장치 마련 등 여러가지 종합적인 처방을 함께 실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부패인사로 법의 심판을 받았던 인사들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희생양’을 자처하며 다시 공직과 선출직에 복귀하는 행태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클린21’ 특별취재팀〓팀장 오명철차장·이병기 부형권기자>watch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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