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고연방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북동쪽으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판체보 공업단지. 다뉴브강을 불과 1km거리에 두고 형성된 이 공업 도시가 ‘코소보 사태’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단행한 20여 차례의 공습으로 ‘다뉴브발(發) 환경재앙’의 진원지로 떠올랐다.
▼독성물질 수천톤 유출돼▼
유고 생태학자들의 주장은 폭격 당시 공업단지에서 ‘사라져 버린’ 화학물질 수천t이 다뉴브강 유역의 토양과 지하수를 심각하게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동유럽 7개국 연합 환경단체인 동유럽지역환경센터(REC;www.rec.org)의 밀레틴 밀로셰비치는 “부서진 공장에서 흘러나온 화학물질과 기름은 다뉴브강으로 흘러들었거나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오염시켰다”고 주장했다. 불타버린 물질도 독성 입자가 공중을 떠다니다가 결국엔 지표면 어디엔가 떨어져 토양을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신유고연방 정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사라진’ 독성 화학물질은 수은 100t,양잿물로 알려진 수산화나타륨 3000t, 독성 화학물질인 ECD(염소화합물) 800여t 등 8가지.
전쟁은 인명만 빼앗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유발하는 환경파괴는 역사상에서 수없이 입증됐다.
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면서 불지른 유정(油井) 가운데 일부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올 초 끝난 ‘체첸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체첸반군의 자금원을 차단한다며 수도 그로즈니 주변의 소형 정유공장과 저유탱크 1만5000여곳을 집중 공격해 인근지역 하천이 ‘기름범벅’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지난달까지 이어진 이디오피아와 에리트리아의 국경분쟁에서도 불발포탄의 화약과 매설 지뢰의 독성물질로 식수원이 오염돼 전쟁 난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국방부 환경과장 양임석대령은 “군사작전의 ‘긴급성’ 때문에 군용 장비의 전기장치 가운데 충전 가능한 것이 별로 없다”며 군사장비와 군사작전의 ‘환경 적대성’을 인정했다.
▼다뉴브강 최악오염 우려▼
정교한 폭격능력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전은 상상을 초월하는 환경파괴를 초래한다. 유엔환경계획(UNEP/www.unep.org)의 클라우스 퇴퍼 사무총장은 지난해 11월 ‘유고 환경보고서(www.earthprint.com)’를 발표하면서 “현대전쟁에서 갖는 반인륜적 파괴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헝가리 등 5개국이 참여한 이 보고서는 ‘NATO 공습에 따른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환경피해는 없다’고 NATO에 면죄부를 주었지만 판체보 공장지대가 다뷰브강에서 불과 1㎞도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최악의 환경오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퇴퍼 사무총장은 “상대방의 전쟁수행 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화학 정유시설을 우선 공격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기간시설의 파괴는 최악의 환경 훼손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NATO의 폭격이 중단된 지 만 1년이 된 올 6월 9일. 판체보는 겉으로는 높이 30m 이상의 우거진 나무들이 몇 km씩 줄지어 서있는 ‘푸른 도시’처럼 보였다.
▼기형아 출산걱정 중절 급증▼
판체보 시의원인 이반 자피로비치는 지금은 시민들의 공포가 덜하지만 폭격직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환경오염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마을 곳곳에서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출산할 수 있다는 걱정에 임신중절 수술을 앞다퉜죠. 지난해 하반기에는 97,98년 같은 기간 보다 낙태가 50% 이상 늘었어요.”
판체보에서 농사일과 전기 배선일을 함께 하는 마르코 팔로(53)는 “아내도 폭격 직후에는 과일이나 소고기 생선을 살 때 ‘어디서 난 것이냐’를 물었지만 이제는 운명에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환경 불감증’은 경제난의 산물이다. ‘오늘 저녁꺼리가 판체보 하류지역에서 잡은 물고기인지, 판체보 인근 농지에서 재배한 감자인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을 정도로 경제난이 심각하다. 산업시설들도 돈만 생기면 공장 재가동을 위한 시설 복구에만 투입했을 뿐 폐수처리 시설은 폭격으로 부서진 채 그대로 방치돼 있다.
그러나 야당출신인 스르디얀 미코비치 판체보 시장은 “국제사회가 NATO의 만행에 침묵하는 것도 문제지만 유고 정부도 정치적인 이유로 전쟁에 따른 환경문제를 손대지 않고 있다”며 인터뷰 내내 정부를 비난했다. 조사결과 ‘판체보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 과일 고기의 3분의 1이 식용불가능’이란 결론이 내려질 경우 뒷감당이 어렵고 NATO와의 관계도 악화될 것을 우려해 정부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립 베오그라드대 라도예 라우셰비치 교수는 유고가 직면한 환경 재앙 가능성을 시한폭탄에 비유했다. 모든 문제가 수면 아래로 숨어들어가 현재로선 폭탄이 제거됐는지 장착된 타이머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폭탄이 터지고 나서야 수습에 나설 수는 없지 않느냐”며 “정부의 의지 및 재원부족, 시민들의 무관심,서방국가의 침묵이 맞아 떨어져 사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무고한 수백만명 생명 위협▼
다뉴브강은 알프스에서 시작돼 독일 오스트리아 신유고연방을 거쳐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거쳐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다국적강. 라루셰비치교수가 ‘다뉴브강 살리기’ 문제가 결코 ‘강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고 동유럽 국가의 연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C본부의 밀톤 라도바노비치는 “NATO가 민간인 피해를 없애겠다며 군사관련 시설만을 공격하는 ‘스마트 공습’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무고한 시민 수백만명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빚었다”며 환경의 복수를 경고했다.
<판체보(유고)=김승련기자>srkim@donga.com
▼"다뉴브강 오염은 왜 모른체 하나"▼
올 여름 신유고연방의 지식인층 사이에선 미국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가 단연 화제다. 줄리아 로버츠가 브로코비치로 분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식의 수많은 ‘법정 영화’의 하나지만 유고인들에겐 ‘미국의 이중성’을 꼬집기에 안성맞춤인 탓이다. 브로코비치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슬라브계라는 점도 유고인들에게 묘한 동질성을 주는 점으로 작용했다.
영화는 미국의 전력회사인 PG&E의 발전 시설에서 흘러나온 중금속(크롬)이 인근 마을의 식수원에 흘러들어간 것을 묵살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87년 4000억원대 손해배상금을 물어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베오그라드 국립대 라도예 라우셰비치 교수는 베오그라드 식물원 안의 사무실에서 인터뷰 도중 이 영화를 언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몇몇 시민이 입은 환경 피해에 그토록 집착하는 미국이 왜 다뉴브강 유역을 독성 화학물질로 오염시켜 놓고 무책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 NBC방송이 올 초 체첸사태 당시 수도 그로즈니 주변의 소형 정유공장이 파괴되자 체첸인들이 ‘화학물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고 방송했지만 자신들의 잘못에는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오염의 피해가 인체에 나타나는 것이 영화에서처럼 10∼20년에 걸쳐 서서히, 뒤늦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도 관심을 끄는 대목. 라우셰비치 교수는 “미국과 NATO는 ‘즉각적인 중독증세’가 없지 않느냐며 발뺌하고 있지만 언젠가 오염 피해가 발생하면 미국법원에 소송을 내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오그라드〓김승련기자>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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