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내에는 시험기간 탓인지 학생들보다 곳곳에 자리잡은 사복경찰과 경호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강의장소로 예정된 국제관 321호는 들어서는 입구부터 북적대고 있었다. 수강생 명단을 든 조교와 강의실에 들어가려는 비수강생들 간에 가벼운 실랑이가 났기 때문이다.
“대통령학 강의를 듣지 않는 청강생들은 미리 신청을 했어야한다”는 조교의 말에 이들은 “학생이 강의들을 권리도 없냐”며 맞섰다.
조교가 “우리도 난처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끝내 입장을 저지하자 학생들은 “총학 불러와, 총학!”하며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 옆에서 경호원들에게 신분을 확인받고 취재장비까지 꼼꼼히 검사를 맡은 후 강의실에 들어섰다. 140석 규모의 강의실은 벌써 수강학생, 청강생, 언론사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1시 30분이 되자 경호원들 사이에서 “지금 출발하셨어, 지금”하는 소리와 함께 김 전대통령이 강의실로 들어섰다. 우려했던 학생들과의 마찰은 없었으며 수많은 기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호원만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학생 중 한 명이 일어나 호칭문제를 정리했다. 수강생들은 “김 전대통령께서 강의를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니 ‘선생님’으로 호칭을 정했습니다다”라고 말했다.
이어 담당교수인 행정학과 함성득교수는 인사말에서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음을 언급했다.
김 전대통령은 이에 대해 “내가 외국 유명대학들에서 많이 강의를 해봤는데, 그 사람들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로 질문을 하지 않습디다. 그러나 나는 질문 받겠다 해서 하버드에선 무려 40분간이나 질문시간을 가졌어요. 그 대학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더구만”이라고 말했다.
강의의 주제는 92~97년 재임 기간중의 치적에 관한 것이었다.
▲청와대 안가 철거▲
“내가 취임하고 안가를 가봤어요. 어찌나 호화로운지… 경비는 또 얼마나 삼엄한데. 거기서 여자들하고 논 거예요. 그러다 박대통령은 총에 맞았지만… 이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즉시 없앴지”
▲하나회 해체▲
“군 장성들을 싹 갈아치우고 즉시 새로 임명을 했지. 빨리 후임자를 확정짓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그런데 임명식 때 장성들한테 달아줄 별이 없는거야.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준비를 못한거지. 해서 내가 그랬어. 지금 장군들한테 가서 떼어와라!”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자 김 전대통령은 “이건 나밖에 모르는 얘기야. 나만의 비화라구”하며 분위기를 돋궜다.
▲대북 정책▲
신이난 김 전대통령은 다음 말을 이었다. “전쟁말이야. 클린턴은 전쟁을 하자고 했어. 나는 전쟁은 안된다고 했고. 둘이 그렇게 전화로 자주 싸웠지. 최고로 오래할 땐… 31분까지 통화했어”
이야기가 대북 정책으로 넘어가자 목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대북 식량지원을 하는 배가 북한에 들어섰어. 그러니까 태극기를 떼라는 거야. 곡식자루도 우리 건 안된대요. 내 참… 다시는 이북에 식량 안보낸다 했지”
▲현철씨 문제▲
‘역사 바로세우기’를 통해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금융실명제를 ‘역사적인 일’이라고 소리높여 이야기하던 김 전대통령은 아들 김현철씨의 구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더우니 양복 윗저고리를 벗어도 되겠느냐”며 말을 이었다.
“내가 걔를 미국에 두 번이나 보냈어. 여기 있으면 달라붙는 사람들이 있을테니 거기서 공부하라고. 재임기간 만이라도 제발 돌아오지 말라고. 그런데 또 돌아오데… 자식은 마음대로 안돼요. 나도 스물여섯에 처음 국회의원 나간다 했을 때 아버지 말 안들었거든. 내가 말 안들었으니 내 아들도 내말 안들을 줄 알았지”
그리고 “그 녀석 틀림없이 국회의원 나올겁니다. 어디서 나올진 몰라도 다음에 꼭 나올겁니다”라며 웃었다.
▲경제위기▲
노동법과 한국은행법 개정이 안됐고, 기아사태가 났기 때문에 IMF가 터진 것이라며 “주변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나한테 경제가 위기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노동법개정을 막았고 기아사태 때는 ‘국민기업을 살리자’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라며 “경제원리대로 하려고 했지만 못하게 해서 IMF가 초래됐다”고 밝혔다.
그는 “내 재임기간 때는 해외빚이 40억이었는데 지금은 그 수십배”라며 “IMF가 끝났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아쉽다”며 경제위기에 대한 유감을 표시했다.
▲대통령선거 관리▲
“내가 대통령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지 않았으면 지금 대통령은 대통령이 안됐을 것”이라며 “내가 지금 대통령의 비자금수사도 중지시켰다”고 말했다.
▲지방자치제 실시 및 한자부활▲
“재임기간에 지방자치제가 전면 실시됐는데 사람들이 내 업적은 다 잊어버렸다”며 “군인 출신 대통령은 어디가서 한자도 못쓰던데 내가 한자도 부활시켰다”고 해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다.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학생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수업을 담당한 함성득교수는 “재임기간의 질문을 위주로 해달라”며 질의응답의 시작을 알렸다.
대통령 단임제에 대한 질문에서는 “내가 그(단임제) 헌법을 제정할 때 관여했다”며 “4년, 4년해서 8년이면 독재로 간다. 중임제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정권의 레임덕 현상과 준비된 대통령에 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는 “DJ의 레임덕은 이미 오고 있다”며 “가장 준비 안된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라며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 때 사회학과 98학번 윤여일 학생이 “질문을 드리기 전에 한말씀 드리겠습니다”로 질문을 시작하려 하자 함성득교수가 일어나 “92~97년 재임기간의 질문만 드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려는 학생과 이를 저지하려는 교수 사이에 가벼운 언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김 전대통령은 앞쪽에서 “괜찮다. 나는 학생들의 이야기 듣는 것이 좋다. 말하게 놔두라”고 질문을 청했다.
학생은 이윽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존재론적 자기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김 전대통령은 “나는 식물인간이 아니다. 나마저 침묵하고 있다면 국민과 역사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며 “살아있는 동안 하고 싶은 말은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강의를 마친 김 전대통령은 앞쪽에 앉은 학생들과 교수에게 악수를 청한 뒤 박종웅 의원 등 측근들과 경호원에 둘러싸여 강의실을 나갔다.
이 강의를 담당한 함성득교수는 “학생들의 질문이 꽤 비판적이었음에도 수월히 답변해 주셨다”며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강의내용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김 전대통령을 강의에 초청한 이유에 대해 함 교수는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 모두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며 “이와 같은 강의를 통해 바람직한 ‘전직 문화’가 조성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오세린·이희정/동아닷컴기자 oh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