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에서 가는 해를 보내고 내친 김에 영일만으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함께 했던 영일만 인근 주민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해돋이 길에 나섰다가 서울 도심과 다를 바 없는 차도를 메운 차량의 행렬과 어마어마한 인파에 해돋이는 커녕 기부터 질렸다.
새해 벽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새해 소망을 비는 건 좋은 일이 분명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마치 유행처럼 한꺼번에 차량을 몰고 조용한 겨울 바다를 헤집고 다니는 현실은 못내 거북스러웠다.
어린 시절을 동해안 바닷가에서 보낸 터라 사람들의 새해 해돋이 열풍이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풍습이기보다는 한 때의 유행과 같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상술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장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때부터 나는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인파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혼자 보내고자 해왔다. 그래서 새해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동해보다는 서쪽으로, 또는 사람들이 덜 찾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올해는 예년보다 운이 좋아 경북 청도의 조용한 산사에서 얼음 밑의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행운을 누렸다. 경건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산사에서 스님들이 치는 새해의 타종 소리를 들끓는 인파 속이 아니라 홀로 서서 듣노라니 그 고요가 그리 고마울 수 없었다.
그 며칠간 온전히 혼자가 되어 환경운동가로서의 나의 삶을 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핸드폰도 받지 않고, 신문도, 텔레비젼도 보지 않은 채 일체의 세상 소리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올해로 환경운동을 시작한지도 10년하고도 몇 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부끄럽게도 나의 삶은 환경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산사에서 읽은 '아름다운 산에 와서도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보다는 버스시간에 맞추기 위해, 남들한테 뒤쳐지지 않으려고 경쟁적으로 걷는다면 산에 갈 필요가 없다'는 짧은 글은 내 삶의 궤적을 아프게 가리키고 있다.
정신없이 산다는 것이 끝없이 미덕일 수는 없다. 바쁨이야말로 나의 운동과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 운동과 조직을 위해서라는 대의 아래 스스로 중요한 많은 것을 무시하고 살아온 시간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조금만 현실에서 물러나 보면 대의에 가려 보이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삶이 있다. 지혜가 묻어나는 환경운동, 환경파괴자들과의 싸움 속에서도 자연과 사람에 대한 감동이 배어 있는 환경운동을 하고 싶다. 그런 시간을 위해 기도한다.
'나의 사유가 2001년 산사에서의 고요와 늘 닿아 있게 하시고 침묵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면을 비어있게 하시며, 그 비어있음으로 내 삶을 충만하게 채울 실천을 이루게 하소서.'
한 해가 갔다. 새해가 왔다. 우리들의 기도 또한 새로운 것을 축복하는 출발이어야 할 일이다.
김혜정/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kimhj@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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