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칼럼]차병직/정치자금세탁 원천봉쇄를

  • 입력 2001년 2월 13일 19시 17분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에서 일하는 이태호씨는 혼자 사는데다 바쁘다는 이유로 잘 씻지 않아 동료들로부터 곧잘 핀잔을 듣는다.

그의 두꺼운 겨울 겉옷의 소매를 살펴보면 묵은 때가 반질반질하다. 세탁할 시간이 없는데다 세탁소에 갖다 맡길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티베트의 라마승처럼 청결하다. 그래야만 이 사회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부정부패 문제와 그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씨의 외형상 단정치 못함은 그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탁하지 않는 것이 깨끗함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역설적 항변인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채 더러운 돈을 세탁해대는 이 땅의 부패한 정치인 기업가 공무원들에 대한 질책인 것이다.

▼자금세탁방지법서 뺄 움직임▼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지난해 6월 자금세탁방지 비협조국가(NCCT)로 15개국을 지정했는데, 한국은 자금세탁방지법을 제정하겠다고 해 위기를 면했다. 하지만 해를 넘기고 새봄이 다가와도 법안은 국회 문전에서 놀고 있다. 이대로 가면 6월에 열리는 파리 총회에서 한국은 자금세탁방지 비협조국가로 지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게 되면 대외 신인도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다급해진 정부는 국회에 관련 법안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양이다.

시민단체에서 부패방지법안을 청원한 것은 무려 5년 전이다. 자금세탁에 관한 규제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그 법안은 한때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서명을 받았다. 시민단체 연대모임에서 3대 개혁 법안을 다그치자, 그제서야 정부는 자금세탁 부분을 별개 법안으로 다루겠다고 나섰다. 재정경제부가 작년 10월 입법예고한 2개 법안의 이름은, 그 내용 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들다.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특정범죄로 인해 얻은 이익을 몰수해 범죄를 조장하는 요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취지다. 특정 금융거래 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은 금융 거래를 통한 자금 세탁 행위를 규제해 범죄를 예방하고 금융 거래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목적이다. 각 법안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목적과 취지가 달성될 수 있을지는 그 아래의 조문들을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시시콜콜한 쟁점들은 모두 제쳐놓고, 요체는 두 가지란 사실을 명심하자. 부정한 정치자금과 기업의 비자금 형성을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과 그런 돈의 음성적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일정액 이상의 현금거래를 신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 법안이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는 특정 범죄에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위반은 제외돼 있다. 나아가 사기 횡령 배임 등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정치자금뿐만 아니라 기업의 비자금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시민단체는 그래도 국내 관행을 고려해 자기앞수표를 포함한 2000만원 이상의 현금거래 때 금융기관이 국세청에 통보하도록 하라고 요구했지만 정부안은 이마저 외면한다. 단지 거래자가 자금 세탁을 하고 있거나 범죄에 관련됐다는 의심이 들 때 금융기관이 보고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도대체 금융기관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부정행위를 판단한다는 것인가.

▼기업 비자금 반드시 포함시켜야▼

이런 법안을 놓고 왈가왈부하다간 6월도 금방이다. 설사 법안이 통과돼도 누가 자금세탁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 한심한 것은 어쩌면 국회 재경위 소위의 비공개회의에선 정부안보다 더 후퇴한 법안이 통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돈세탁이란 말은 미국 마피아가 불법자금을 이탈리아인들이 경영하는 세탁소 수입으로 위장한데서 비롯했다. 물론 세탁기의 용도는 다양하다. 나치에 교유기(攪乳器)를 몰수당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세탁기로 버터를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로스앤젤레스에선 칵테일 혼합기로 전용됐고, 하와이 부근 섬에서는 낙지를 집어넣고 돌려 맛을 부드럽게 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돈을 세탁하는 것만은 곤란하다. 세탁한다고 해서 결코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돈이라는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상적인 자금세탁방지법이 탄생하면, 이태호씨나 나는 비로소 자신의 신체와 의복에도 신경 쓸 것이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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