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위기는 보통의 위기가 아니다. 실상 가까이 보이는 이것저것 몇 가지만 따져봐도 그렇다. 한두 장관의 인사 실패로 인한 정부의 신뢰 추락과 여당 내부 개혁의 소용돌이는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있고, 야당은 일련의 혼란에 대한 유불리의 계산에만 바쁜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는 모습이다. 상반기의 경제는 최대의 고비를 향해 치닫는데, 민노총의 연대파업에 대해 대통령은 원칙과 법만 말하고 있다. 인권단체에서 개인의 정보에 대한 자기 결정권 침해와 개인정보 유출의 우려를 외치는데도, 보건복지부 장관은 2조원에 이르는 전자건강카드 시장의 사업설명회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정도의 정치적 사정이란 우리 사회의 일상에선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것이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가뭄과 겹치니 보통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흔히 쓰던 총체적 위기 따위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대안이 없는 위기라고 서둘러 표현을 바꾸어 본다.
마땅히 대안이 없을 정도의 위기라면, 어떠한 것도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궁하면 통한다거나 극과 극은 닿는다는 세상 이치가 그러하듯. 반성과 각성의 소리가 터져나오는 자체가 위기를 극복할 힘의 존재를 반증하는 것처럼. 그래서 외부적 조건이 불가항력으로 불리할 때 최종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분발력이고, 이 분발력의 발휘는 도덕적 결심으로 매개된다는 고려대 김우창 교수의 말에 수긍이 간다. 최악의 가뭄이란 자연현상이 우연이 아니라, 기필코 그 책임의 일부가 우리 자신에게도 귀속되는 필연처럼 다가오는 느낌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물질적 위기와 정신적 위기가 중첩되는 곳에서 도덕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금 모든 국민은 각자 논밭의 갈라진 틈을 메우거나 황폐해가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다. 도덕적 결심이란 앞으로 자신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더 강화시키기보다는, 우선 자신의 감정에서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에는 상황을 이 지경으로 끌고 온, 경우에 따라서는 심정적으로 가뭄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정부와 정치에 대한 분노를 누르고, 일시적이나마 너그러운 자세가 된다. 대통령이 국정쇄신책 대신 특별담화라는 이름의 기우제를 펼쳐도 듣고 있고, 호스를 들고 남의 논밭에 서 있는 야당 총재의 벗은 발에 묻은 물방울조차 아까워도 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그들에겐 기회가 되는 셈이다. 회복할 길이 없어 보이던 질곡에서 우연과 필연이 뒤엉키는 가운데 한 가닥 길이 보이는 셈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이 때를 놓치지 말고 쇄신책을 제시해야 한다. 여당과 야당은 적절히 조언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이 기회는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잠시 머뭇거릴 틈도 허용되지 않는 극히 짧은 순간일지 모른다. 가뭄 극복을 위한 모금이 끝나면 인내도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 국민 각자의 도덕적 결심이 정부와 정치에 대한 요구로 눈길이 돌려지는 순간에는 이미 늦다.
대통령이 지난주 약속했던 국정쇄신책 발표를 연기했다. 대신 가뭄극복을 위한 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으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자연재해의 타격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담화는 서로의 도덕적 약속에 불과하다. 그것도 국민은 이미 그 마음의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연기는 기약이 없어서도 안되거니와, 며칠을 넘겨서도 곤란하다. 국민의 이 너그러운 마음의 상태에 호소할 수 있는 대안을 빨리 제시해야 한다. 이제야말로 개인적이고 계파적이고 당파적인 사사로움에서 벗어난 결심을 보여야 한다. 아무 것이라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위기에 대안을 찾을 기회를 정부에 양보한다.
차병직(이화여대 대우교수·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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