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수업 장면 가운데 하나다. 부모 세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들의 부모 또는 조부모로부터 밥상머리에서 젓가락질 요령을 배웠건만 이제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것을 전수하는 몫은 남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내 아이’만 있고 ‘우리 아이’는 없는 이기주의 속에서 가정에서 이뤄져야 할 기본적인 생활교육이 사라진 지 오래다. 부모의 이기적 육아 속에 아이들이 남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한다는 개탄의 목소리도 높다.
‘자녀에게 최고의 선생님은 부모’라는 평범한 진리가 허물어지고 있는 현장을 살펴본다.
▽내 아이가 최고, 남의 아이는…〓 “요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지는 걸 눈뜨고 못봐요.”
▼글 싣는 순서▼ |
- 조기교육에 멍드는 아이들 |
서울 강남의 한 유치원 교사(31)의 말이다. 아이가 친구에게 맞았을 때 그들끼리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도 “기 죽으면 안된다”며 “너도 가서 때리라”고 교사 앞에서조차 스스럼 없이 부추긴다는 것.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남의 또다른 유치원 교사 역시 “교사가 자기 아이 나무라는 것조차 못 참는 부모들이 태반”이라며 “이렇게 응석받이로 자란 아이들이 ‘의존적’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마련되는 육아정보 교류 자리에서도 ‘경쟁’은 치열하다.
5살, 7살 아들을 둔 박모씨(41)는 얼마전 중산층이 많다는 경기 고양시의 한 동네로 이사온 뒤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유치원에서 ‘내 아이’만 나아보이게 만들려는 경향이 너무 강했고, 육아와 관련해 정말 괜찮은 정보는 남에게 전혀 밝히지 않더라”는 게 그의 소감.
이같은 행태는 장애아 또는 편부모 슬하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게 될 때 극명해진다.
“선생님, 그런 애를 받아주면 딴 데로 옮길 거예요.”
지난해 다운증후군을 앓는 6살 장애아가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 입소신청 했을 때의 일이다. 학부모들이 “그 아이에게 손이 많이 가 결국 우리 아이가 ‘손해’보는 것 아니냐”며 적극 반대했고 결국 그 장애아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어린이집 원장은 “장애아는 물론 편부모 슬하 아이들이 들어오는 것까지 항의하는 부모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연세대 정문자(鄭文子·아동학)교수는 “요즘 아이를 한둘씩만 낳는 만큼 자기 아이를 끔찍히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무엇이 아이를 위하는 일인지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고 개탄했다.
부모의 비뚤어진 욕심은 사회성과 책임감, 규범의식 등 어린 나이에 체득해야 할 덕목에 당연히 문제를 낳는다.
원광아동상담센터의 유미숙(劉美淑)소장은 “가정에서 ‘최고’ 의식을 주입받은 아이들은 유치원 등에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때 피해의식 또는 열등감을 느낀다”며 “이게 바탕이 돼 거짓말이나 막무가내로 떼쓰기, 심할 경우 어머니에게 공격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망각된 소임〓 무슨 수를 써서든 자기 아이를 남과 다르게 키우겠다는 욕심의 그늘에는 뜻밖에도 부모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모순된 행태가 숨어 있다.
“좋은 옷과 비싼 장난감은 가졌는데, 그런 아이들이 아침 밥을 못 먹고 와요.”
매일 아침 전국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진다. 집에서 식사를 하지 못한 일부 아이들이 초코파이와 요구르트 등으로 아침을 ‘때우는’ 것.
심지어 아이 엄마가 유치원 앞 상점에서 이런 것들을 사주어 들려보내는 장면까지 자주 눈에 띈다. 때문에 점심 식사시간을 앞당기는 보육시설까지 생겼다.
서울 중구의 한 어린이집 원장은 “모처럼 아이와 함께 점심식사 할 수 있는 토요일까지 아이를 등원시키는 맞벌이 부부가 꽤 있다”며 “교사들끼리 ‘부모 자격증’을 발급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한다”고 소개했다.
아무리 부유해도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허물어진 것. 사정이 이러니 어른을 배려하고 자기 물건을 자신이 정리하게 하는 등 가정에서 이뤄져야 할 ‘생활교육’은 엉터리이기 일쑤다.
한 직장어린이집 원장은 “교사에게 반말 쓰는 애들이 적지 않은데 특히 이런 애들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교사에게 화 내고 떼 쓰다가 부모가 나타나면 더욱 심해진다”며 혀를 찼다.
▽진단과 대책〓 핵가족화와 도시화로 육아의 모든 문제가 젊은 부모들에게 넘겨진데서 문제가 비롯된다. 가족 또는 이웃들로부터 단절된 젊은 부모들이 경험 많은 이들로부터 육아의 노우하우를 전수받는 시스템이 사라진 것.
서울대 신민섭(申敏燮·소아정신과)교수는 “젊은 부모들이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우려 하나 정보부족 또는 무지로 그저 ‘자기 생각’을 무조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며 “육아의 눈높이를 아이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개인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겹치다 보니 ‘이기적 육아’가 팽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
공동육아연구원 이기범(李起範·숙명여대 교수)공동대표는 “부모의 고립으로 육아에 도움을 줄 사람을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문제”라며 “육아문제를 터놓고 상의할 수 있는 가족과 이웃의 네트워크를 다시 구성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네트워크 속에서 교류가 이뤄지는 가운데 부모 스스로 잘잘못을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교수는 그 한 방편으로 같은 또래 아이를 둔 부모들이 모임을 구성하고 ‘몸’으로 부딪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나갈 것을 제안했다.
▼'된사람'으로 키우려면▼
전문가들은 “자녀교육 문제의 대부분은 ‘최고’만 인정하는 사회분위기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부모의 기대로부터 비롯된다”며 이같은 사회적 강박관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조언한다.
연세대 박경자교수(아동학)는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제대로 된 육아정보에 항상 관심을 기울일 것과 ‘성장 연령대와 기질에 맞춘 작은 실천’들을 권유한다.
어머니는 아이가 타고난 특유의 기질을 재빨리 파악, 이에 맞춘 육아를 해야 한다는 것.
꼼꼼한 스타일의 어머니에게 부산한 성격의 아이가 있다면 어머니 눈치 보느라 아이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고 다시 어머니는 아이를 다그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두 살전까지는 무조건적인 사랑, 세 살때부터 언어발달 놀이 등 발달단계에 따른 단계적 대응을 꼭 염두에 두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또 경험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주입식 교육은 정서를 비뚤어지게 하고 또래 집단과의 교류에도 악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 따라서 학원 또는 과외학습을 조금 줄이고 부모가 하루 한시간만이라도 직접 지도하되 아이가 잘 따라오지 못하더라도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는 게 ‘경험에서 얻은 황금률’이라는 얘기다.
한편 최근의 조기 사교육 열풍과 관련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임영재 운영위원장(45)과 ‘좋은 어머니들 모임’의 조경림 회장(33)은 “경험상 아이들에 대한 주입식 지식교육은 정서를 비뚤어지게 할 뿐더러 또래 아이들과의 교류에도 어려움을 낳는다는 게 회원들의 공통된 지적”이라고 소개했다.
이화여대 이기숙 교수(유아교육학과)는 “아무리 조기 영유아교육 열풍이 거세다 해도 자연친화적 인성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학교에 진학해서도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게 학계의 연구결과일 뿐 아니라 여러 실증적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반병희기자 bbhe424@donga.com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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