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포트/2001한국사회]극과 극 오가는 '가면인생'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36분


다국적기업 A사의 한국지사 이모부장(38). 최근 직원들과 서울 강남의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는 접대부와 ‘2차’를 나갔다. 귀가해서는 여느 때처럼 아내와 잠든 딸에게 입을 맞추고 잤다. 매주 한 번 정도 있는 일. 신혼초 잠깐을 빼고는 죄책감은 갖지 않았다. 이부장은 아내와 네살배기 딸에게 모범가장, 직장에서는 잘 나가는 간부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불법인줄 알면서도 사내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로 1억원을 거둬들였다. 주위에서는 명문대 출신인 데다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그를 ‘만능맨’으로 치켜세운다.

가정에선 자상한 아빠, 직장에선 일중독자, 회식장소에선 터프가이, 때에 따라 범법자. 우리 사회는 ‘선량한 개인’이라도 극단적으로 다른 얼굴로 바꿔가면서 살아야 하는, ‘다중 인격’사회다. 원칙을 지키면서 ‘한 얼굴’로 살면 ‘융통성 없는 인물’이 되기 일쑤. 이런 상황이 사회 전반, 생활 깊숙이 도덕불감증을 낳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황모씨(33)는 운전 경력 6개월.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서 신호를 꼬박꼬박 지키다 수없이 봉변을 당했다. 보행자도 없는데 정지했다고 ‘빵빵’거리는 뒤차들. 욕설을 듣기도 했다. 교단 앞에선 ‘신호준수’, 신호등 앞에선 ‘나 하나쯤 신호무시’의 사고. 한국 사회는 도처에서 ‘두 얼굴’을 강요한다.

▼글 쓰는 순서▼
- '홀로서기 기피'
- 외모 만능주의
- 집단 히스테리
- 두얼굴의 '인격'
- 평등 지상주의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박사는 “누구나 다양한 ‘가면’을 갖고 있으며 적절한 ‘역할 분담’은 정신건강에 좋을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그 ‘가면’이 극단을 오가면서 일치된 자아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신과에서는 개인이 몇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을 갖고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사는 것을 ‘분리 정체성 장애’ ‘다중인격장애’라고 진단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점에서 영락없는 ‘다중인격 사회’인 셈이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여러 ‘인격’ 중 하나라도 빈틈을 보이면 눈총과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지방공무원 출신인 허모씨(48). 양심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지난해 중학생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뒤 구설수에 시달리고 있다. “공무원 월급으로 어떻게 돈을 모아 아들을 조기 유학 보냈겠어?” “그 사람 교회 다니는데, 교인이 술 담배 다 하는 것 같은데.” 주위에선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60평짜리 아파트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허씨는 “청렴하고 가난한 공무원이자 금욕적인 종교인,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모범가장 등 ‘완전무결한 인간’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다”고 푸념한다.

비단 그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우리는 애향심, 너희는 지역감정’ ‘예외를 두면 안되지만 나만은 예외’ 식의 정서적 인격적 불일치가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0년 넘게 한국생활을 한 주한 미 상공회의소 제프리 존스 회장은 지나친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을 ‘두 얼굴 인격’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존스회장은 “나는 나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왜 그렇게 남에게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도 익명성이라는 특성과 함께 두 얼굴의 인격체가 양산되고 있다. ‘흠 없는 겉모습 지키기’에 억눌린 직장인들이 인터넷이란 배출구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마음껏 드러낸다. 원조교제와 폭력, 자살이 광적으로 연결된다.

동아닷컴 뉴스팀 최영록부장은 “자유게시판에서 입에 담기 힘든 엽기적 욕설로 가득찬 글들을 하루 100개 이상 지우고 있다”고 말했다. 평소 근엄하고 성실하다고 알려진 인물이 ‘원조교제’의 나락에 빠져 있는 사실이 심심찮게 언론에 소개되기도 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전지전능한 인간을 이상적 인간형으로 제시함에 따라 구조적으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많이 양산되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한국인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의 수를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오명철차장(팀장·이슈부)

이성주 이호갑 이은우 김준석기자(이상 이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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